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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91화 (91/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91화

* * *

이시스는 웬만해서 서부를 벗어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얼마 전, 그의 앞으로 온 공녀의 편지를 받고 곧장 아텐츠 아카데미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딘이 위험해요.]

간결하지만 급박함이 담긴 편지 내용에 이시스는 아카데미로 가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부에서 아카데미로 가는 내내 이상한 소문들이 들려왔다.

“에린 리서스가 사실 흑마법을 이용해 강해진 거라며?”

“리서스 후작이 몰래 도망쳤다더라, 그도 폐하의 진노가 두려웠나 보지.”

이시스는 헛소문이라고 치부하며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들리는 말들이 그의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에린 경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지만 공녀님은 페르딘 전하가 위험하다고 했는데…….’

조급한 마음으로 아카데미에 도착한 이시스는 정문 앞에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공녀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급히 출발하느라 답장도 보내지 못하였는데 그녀가 자신을 마중 나와 있다니?

하지만 그에 관해 물을 새도 없이 이시스는 공녀에게 이끌려 의무실로 가게 되었다.

“공녀님, 저를 속인 겁니까?”

이시스가 공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페르딘의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대체 공녀는 자신에게 왜 그런 편지를 보냈단 말인가?

“전하께선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페르딘은 전투를 치른 듯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지만 상태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이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딘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공녀가 이시스를 이유 없이 불렀을 리 없어.’

페르딘의 시선을 눈치챈 공녀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뗐다 다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시스에게 그간 그들이 겪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그 악마 놈들, 전부 지옥에나 떨어졌으면 좋겠군요. 그런 끔찍한 누명을 씌우다니요! 우리 에린 경께서 그런 사람일 리 없잖습니까.”

우리 에린 경?

페르딘은 이상하단 눈으로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서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에린을 부르는 호칭이 ‘우리 에린 경’이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동감입니다.”

이시스의 말에 공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페르딘과 이시스를 한 번씩 번갈아 보다 이시스를 향해 말했다.

“이시스 님, 제 손 좀 잡아 주시죠.”

갑작스러운 부탁에 이시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공녀를 바라보았다.

“징그럽게 대체 왜……?”

“정말,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다니까…….”

“…….”

“혹시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그냥 좀 잡아 봐요.”

공녀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그러자 이시스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공녀는 손을 꽉 쥔 채 페르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르딘, 당신은 에린 경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지……?”

“…….”

“이번에도 과거와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겠어?”

페르딘은 공녀가 얼마 전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었다.

페르딘은 공녀를 보며 그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의 어머니 역시 공녀처럼 자주 예언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몸이 약해져 갔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페르딘이 더 이상 예언을 하지 말라고 그녀를 말리면 어머니는 항상 똑같은 말을 했었다.

“페르딘, 성녀의 목숨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다.”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선 가끔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거야.”

페르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공녀가 지금 하고 있는 예언은 무엇을 지키기 위한 선택인가.

“공녀, 당신 그러다가 죽어.”

그의 말에 공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선택이야, 페르딘 렉시아. 네가 선택했던 것처럼 나 역시 선택한 거야.”

공녀가 이어서 말했다.

“페르딘 렉시아, 넌 죽을 거야.”

덤덤한 선언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예언의 당사자인 페르딘은 평온했으나 오히려 공녀의 손을 붙잡고 있는 이시스가 분노해 소리쳤다.

하지만 공녀가 이내 몸을 휘청이자 이시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야 공녀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것이다.

이시스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안 됩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전대 성녀님께서…… 우린 행복해질 거라고…….”

전대 성녀는 늘 그들에게 행복해질 거라 예언했었다.

하지만 지금 공녀는 정반대의 예언을 말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기준에선 그랬다.

페르딘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예언은 확실한 게 아니야.”

“…….”

“미래가 바뀌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여신님의 변덕에 바뀔 수도 있고, 아니면 나 같은 성녀가 미래를 말한 탓에 변할 수도 있지.”

“…….”

“혹은 잊힌 시간에서 되돌아온 자에 의해 변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공녀는 비틀거리며 페르딘에게 다가갔다.

“페르딘 렉시아, 과거의 너는 떠나는 걸 선택했었어. 이번엔 리서스 후작성이야. 넌 어떤 선택을 할 거야?”

“내 선택이 그녀와 연관되어 있구나.”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리서스 후작성으로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페르딘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리서스 후작님이 죽을 거야.”

“…….”

“페르딘, 여신님께선 내게 그 하나의 길밖에 알려 주지 않으셨어.”

페르딘은 아침에 본 에린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절대 혼자 두고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가 과거에 한 선택이, 에린을 괴롭게 만든 건 확실했다.

페르딘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그가 걱정되는 것은 그의 죽음 뒤에 남겨져 슬퍼할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가 죽게 된다면 에린이 느낄 슬픔. 그 슬픔이 그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모든 건 너의 선택에 달렸어.”

“…….”

“리서스 후작님이 여신님께 도움을 구하고 계셔.”

“…….”

“떠나길 선택한다면 제1 기사단과 함께 가면 돼. 그리고 꼭…… 이시스를 데려가.”

“그럼 전하의 목숨도 위험하지 않은 겁니까?”

이시스의 질문에 공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지쳐 보이는 얼굴로 페르딘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시스는 그녀의 침묵이 부정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 * *

늦은 저녁, 에린은 페르딘을 보러 의무실로 가고 있었다. 아실리 공작과 대화를 하느라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그가 보고 싶어.’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도 늘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욱더 보고 싶었다. 황궁으로 떠나게 되면 한동안 그를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에린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녀가 의무실이 있는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카론과 마주쳤다.

에린은 그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난 것에 놀라 반갑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자마자 카론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소드…… 아니, 누님…….”

에린은 그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었지만…….

그녀가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에 카론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아니야.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님에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겠지.”

“카론…….”

“오히려 다행이야. 누님이 소드 마스터인 덕분에 모든 오해가 풀렸잖아. 몸은 괜찮아? 레옹 백작을 상대했다고 들었는데.”

“네가 괴롭힘당한 만큼 돌려줬어.”

장난 섞인 말에 그는 밝게 웃음 지었다. 카론이 에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카론과 헤어진 에린은 들뜬 기분으로 계속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기분은 의무실 앞에 도착하자 최고조에 달했다.

그녀는 작게 노크를 하며 말했다.

“페르딘 경,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자 방 안에서 들어 오라는 페르딘의 대답이 들려왔다.

의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에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부 신전에 있어야 할 이시스가 페르딘의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그의 눈가에 붉은 기가 감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이시스는 서부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이시스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카데미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그는 잠시 에린과 페르딘을 바라보다가 헬릭스를 보러 가겠다며 방을 나섰다.

“에린 경, 공녀에게 들었습니다. 공작님과 대련을 하셨다고요?”

“네. 공작님께서 제게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주셔서요.”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페르딘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에린은 그의 미소가 좋았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볼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오곤 했다.

“아실리 공작님께서 같이 황궁으로 가자고 하셨어요.”

“폐하께 인정을 받으려는 거군요.”

“아무래도 그래야 후작가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에린을 바라보던 페르딘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에 릴리아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에린 경, 그녀가 당신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어요.”

“…….”

“바한과 정말 잘 지내고 있다고, 에린 경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직은 미안한 마음에 에린 경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 하더군요.”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는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니까요. 에린 경이 고마워서 더 그런 거일 겁니다.”

“…….”

“그리고…… 바한의 마나 탐지력이 천재적인 수준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마탑주가 그를 제자로 삼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에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자신이 운명을 바꾼 사람들의 소식을 듣게 될 때마다 미래를 더 바꿔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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