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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90화 (90/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90화

“말을 들어 달라고? 그게 경의 부탁인가?”

아실리 공작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에서 무엇이든지 들어줄 수 있다. 그런데도 그저 말을 들어 주길 원하는 건가?”

“…….”

“제국 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보검도, 그게 아니면 영지도 줄 수 있지. 작위를 원한다면, 그것도 폐하께 부탁드릴 수 있어.”

에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전부 필요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아니요. 저는 그런 것들보다 공작님께서 제 말을 들어 주신 뒤, 다른 부탁을 들어주시길 원해요.”

* * *

에린이 대련을 하는 동안 아실리 공녀는 의무실로 돌아왔다.

거칠게 기침을 한 공녀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공작과 에린의 앞에서 멀쩡한 척을 했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연달아 예언을 한 뒤, 신성력을 사용하느라 너무 많은 기력을 잃었다.

“하아, 하아.”

그녀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입을 막았던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망할.”

공녀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잠이 든 페르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단해, 페르딘 렉시아. 괜히 전대 성녀님의 아들이 아니야…….”

그러고는 두 눈을 감은 채 전대 성녀를 떠올렸다.

공녀는 전대 성녀님의 가냘픈 미소 뒤에 숨겨져 있던 강인한 마음을 존경했다.

‘제가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양팔로 자기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남들이 모르는 진실을 안다는 게 이렇게 두려운 거란 걸 이전엔 알지 못했다.

언젠가 진실을 알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두렵다.

죽는 게 두려웠다. 공녀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넌 어떻게 했냐.”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건 어떠한 각오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전대 성녀님도, 페르딘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떻게 목숨을 버렸던 걸까.

공녀는 요즘, 잠을 잘 때마다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전대 성녀님이 등장하는 꿈이었다. 공녀는 자신이 꿨던 꿈을 떠올렸다.

성녀님을 바라보는 번들거리는 황제의 눈빛.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악의.

“그는 악마야.”

방 안에서 전대 성녀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꿈에 빠진 공녀는 그런 성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성녀가 자신을 위해 그 말을 남겼단 걸 알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 미래를 말하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혼잣말을 하는 건 대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황제는 원래도 악인이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악마가 되었어.”

“그가 저지르는 일들로 인해 수많은 인간이 죽을 거란다.”

“신께서 너에게 보여 주실 거야. 그가 만들어 낼 끔찍한 미래를.”

시야가 반전되고 공녀는 보았다.

마물들을 막는 전선이 무너지고,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제국의 백성도, 신성 왕국의 사람들도. 모두 다 비탄에 빠지게 된다.

미래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흘러간다면 죄 없는 많은 생명이 죽을 것이다.

“배가 고파요, 살려 주세요.”

“엄마, 아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았다.

“아가야, 눈을 떠 보렴. 제발.”

자식을 잃은 부모도 보았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거리.

공녀가 시선을 돌렸다.

레옹 백작이 보였다. 그는 기사단을 진두지휘하며 백성들을 죽이고 있었다.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 살 자격이 되지 않는 이들은 살려 두지 마라! 일 못 하는 아이들, 움직이지 못하는 노약자. 나라에 도움이 안 되는 이들은 모두 죽여라!”

그리고 그들을 보며 미소 짓는 황제. 공녀는 그 마물들을 조종하는 자가 황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가 비탄에 빠진 제국을 보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짐은 신이다.”

그것은 과거 에린의 죽음 이후, 제국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신이시여…….’

황제가 만들려는 ‘새로운 세상’은 약하고 도태된 이들은 사라지고 그의 기준에 맞는 강하고 쓸모있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은 세계를 뜻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야. 그들은 금지된 방법을 사용했다.’

공녀는 황제와 그의 수하들이 마물을 조종할 수 있는 이유를 떠올렸다.

황제는 신이 되고자, 흑마법으로 인간을 마물로 만들고, 그들의 무의식에 내재된 정신을 조종하였다.

흑마법은 먼 과거 존재했던 악신의 힘이었다.

그러한 흑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황제는 그 대가 또한 다른 사람들의 목숨으로 지불했다.

‘그 마법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량 학살을 벌인 거겠지.’

그들이 제국을 다스리는 이상, 제국의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것이 모든 세계를 주관하는 여신께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여신의 생각에 공녀 역시 동의했다.

그때, 누군가 의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공녀는 누가 보기 전에, 손에 묻은 피를 허리 뒤쪽에 닦아 냈다.

“공녀님?”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이는 카론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곳으로 온 듯 신발도 신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넋이 나간 얼굴을 한 채 천천히 의무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페르딘…… 페르딘 경은 괜찮은 겁니까?”

그는 페르딘이 침대 위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렸다.

“페르딘은 괜찮아요, 카론 경.”

“저흰…… 대체 제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카론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기억 속에 마지막 남은 광경은 레옹 백작이 무서운 기세로 검을 휘두르는 거였으니까.

“그래, 레옹 백작…… 그자가 분명 저를 죽이려 했는데…….”

“…….”

“저희…… 아버지와 누님이 누명을 썼습니다. 리서스 후작가는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는 공녀의 말에 카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공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레옹 백작이 저희의 결백을 알게 되어서 물러난 건가요?”

공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도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 들었어요.”

“대체…… 백작이 왜…….”

“그러고 에린 경에게 죽었죠.”

“네?”

카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차피 알게 될 테니 얘기할게요. 에린 경은 소드 마스터입니다.”

믿기지 않는 말에 그는 입을 벌린 채, 공녀를 바라보았다.

카론은 너무 놀라, 그대로 옆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았다.

“누님, 누님은…… 아카데미에 와서 처음으로 검을 잡았는데…… 아무리 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도, 그게, 그게 가능한…….”

그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얼마나 충격을 받은 건지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하는 정도였다.

공녀는 그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도 놀랄 정도였으니 카론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에린이 어떻게 강해졌는지 알게 되면 그녀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유를 단번에 납득할 수 있게 될 거였다.

“그러고 있지 말고 이시스 님을 데리러 가죠.”

“이시스……? 그자는 서부의 신관이 아닙니까.”

“네. 그가 곧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왜 서부의 신관이 이곳까지……? 그런데 그가 오는 걸 공녀님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쉿, 알면 다쳐요.”

공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이내 침대 옆에 있는 서랍장의 문을 열더니, 카론에게 편지를 건넸다.

“생각해 보니 이시스 경은 저 혼자 마중 나가도 될 거 같아요, 카론 경은 이 편지를 릴리아 경에게 부쳐 주실 수 있을까요?”

* * *

아실리 공작은 에린과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에린은 자리에 앉자마자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흑마법을 사용한 건 저희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실리 공작은 새삼스러운 소리를 한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에린 경. 리서스 후작은 나와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사이야.”

“…….”

“애초에 후작성의 지하에 흑마법의 흔적이 발견된 것도 누군가의 음모일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 말에 에린은 작게 미소 지었다.

“맞아요. 그 음모를 꾸민 자가 바로 제 어머니 코렐리아 리서스이죠.”

“코렐리아 리서스……?”

에린의 말에 아실리 공작은 얼마 전에 보았던 코렐리아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분명 검 한 번 잡아 본 적 없을 후작 부인에게서 흘러나오는 짙은 살의에 위화감을 느꼈었다.

“서부에서 실종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걸 아십니까?”

“서부? 아니. 몰랐네.”

“그 실종 사건에 후작 부인이 얽혀 있었습니다.”

에린은 그에게 자신이 서부에서 봤던 것들, 그리고 그곳에 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아실리 공작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의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순식간에 손잡이가 부러졌다.

“감히……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놈들이로군. ”

“…….”

“난 경의 말을 믿어. 굳이 내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

“말씀하세요.”

“대체 코렐리아 리서스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에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 일에 관해선 아직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특히 황제의 기사인 아실리 공작에겐 더더욱 그랬다.

“그에 관해선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부탁드릴 건 따로 있습니다, 공작님.”

에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순간, 아실리 공작은 그녀의 눈에서 휘몰아치는 강렬한 분노를 목격했다.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제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분노를 산 이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는 자신과 호각으로 맞붙은 이 기사가 어디까지 강해질지 짐작할 수 없었다.

공작은 에린이 무엇 때문에 분노했는지,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부탁에 더없이 신중하게 대답해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지그시 에린을 바라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는 에린에게 약속을 하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경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뭐죠?”

“나와 함께 황성으로 가 소드 마스터라는 걸 인정받아야 해.”

에린은 그의 말에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야 리서스 후작가를 온전히 지킬 수 있어. 폐하는 인내심이 길지 않으시니 바로 움직여야 한다.”

“…….”

“경이 결백함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폐하의 기사들이 언제 후작 가문 사람들의 처형을 명받을지 몰라.”

“…….”

“심지어는 흑마법에 관한 걸 일부러 은폐했다며 후작성의 사용인들에게까지 죄를 물을지도 모른다. 에린 경, 서둘러야 해.”

공작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썼다. 황제의 성격이라면 전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위험해요.”

에린의 말에 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확실히…… 리서스 후작이 도주했다고 말한 것도 코렐리아 리서스였지.”

“아버지는 아직 후작성에 계실 겁니다.”

에린은 확신이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 있을 때 디트리온이 자신을 회유하려 이야기를 꺼냈으니 그가 한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에린의 말을 들은 아실리 공작은 생각에 잠겼다.

황제가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조사를 위해 파견한 제3 기사단이 움직일지도 모른다.

만약 리서스 후작이 정말로 후작성에 갇혀 있는 거라면 그의 목숨이 위험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공작이 친우를 구출하는 동안 에린이 황성에 가서 후작가의 결백을 밝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터였다.

‘하지만 에린 경을 혼자 황성에 보낼 순 없어.’

그는 에린의 결백을 주장할 가장 강력한 증인이었다. 그것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폐하께서 요즘따라 더 이상해지신 거 같아 걱정되는군.’

아실리 공작은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말을 따르는 것과는 별개로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레옹 백작의 죽음에 노한 나머지 무슨 짓을 저지르실지도 모르지.’

안 그래도 중립파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데 그와 힘의 수평을 이루던 두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 죽었으니…… 말은 하지 않아도 더욱 공작을 경계할 게 뻔했다.

공작은 황제가 자신을 꺼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미운털이 박힌 처지이니 만약에라도 황제가 분노할 시 그가 에린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막아 주어야 한다.

오랜만에 찾은 호적수였다.

아실리 공작은 그녀가 스스로 더 위험한 길로 가지 않길 원했다.

그래서 현재로서 가장 가능성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

“경이 나와 함께 황성으로 향한다면 리서스 후작가에는 제1 기사단을 보내도록 하지.”

“괜찮을까요?”

아실리 공작은 에린이 말한 ‘괜찮다’가 어떤 뜻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들의 실력을 염려한 것이다.

다른 기사들이 듣는다면 기함을 토했을 말이었다.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들로 이뤄진 제1 기사단의 실력을 걱정하다니.

하지만 아실리 공작은 에린을 이해했다. 그녀의 기준이라면 그들의 실력이 염려될 만도 했다.

“적들의 수준을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들이라면 소드 마스터를 죽이지는 못해도, 소드 마스터에게서 도주할 수는 있을 거다.”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에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 이 선택을 후회할 것도 같은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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