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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89화 (89/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89화

* * *

에린이 아실리 공작과 만나고 있는 그 시각, 디트리온은 황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상급 기사가 디트리온을 향해 물었다.

“전하, 카론 리서스의 마지막을 보고 가지 않으셔도 됩니까?”

“레옹 백작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아실리 공작이 도착하기 전까진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

카론을 죽이라는 명령은 디트리온이 내린 것이었다.

황제는 카론 리서스의 처리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두 눈을 번들거리며 ‘네 멋대로 해라. 그런 불량품 따위.’라고 일갈했으니까.

디트리온 역시 원래는 카론에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가 굳이 황제의 명령인 척 레옹에게 카론을 처형하라고 한 건 에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였다.

“궁금하지 않나, 경?”

“네?”

“에린이, 나보고 찾아갈 테니 기다리라고 말하더군.”

“그녀는 아직 감옥에 갇혀 있을 겁니다.”

“맞아, 그 안에서 나올 능력도 안 되는데 나한테 그러한 말을 하니 정말 우습더군.”

“…….”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남동생의 소식을 듣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모습은 조금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디트리온의 옆에 있던 기사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가 모시는 주군이긴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잔혹한 사람이었다.

어쩐지 잘 알지도 못하는 에린 리서스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가 악마 같나?”

허를 찌르는 말에 기사는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디트리온은 그런 그를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기사는 애써 그 섬뜩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아주 먼 과거, 에린은 아실리 공작을 존경했다.

가끔 아실리 공작이 후작성에 방문했을 때 기사들이 그를 바라보던 눈빛을 기억한다.

세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 거대한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위대한 로널드 아실리.

모든 기사들의 우상.

언젠가 나도 검을 배워서 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게 어렸을 적 에린의 작은 소원 중 하나였다.

에린은 아실리 공작이 자신을 배려해 줬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제1 기사단에게 향했다.

최고의 기사, 아실리 공작이 단장으로 있는 기사단이었다.

그만큼 까다롭게 선발된 제국 내 최고의 기사들이기도 했다. 아실리 공작은 그런 이들의 앞에서 그녀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준 것이다.

더는 그녀에게 잡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실리 공작은 에린을 향해 물었다.

“레옹 백작은 왜 죽인 거지?”

“그가 제 동생을 죽이려 했습니다.”

“경이 소드 마스터인 걸 알고서도?”

“예.”

“죽일 만했군.”

“…….”

“하지만 나도 그와 별다를 바가 없는 처지야. 내가 받은 황명은 경을 죽이는 것이다.”

“그렇군요.”

아실리 공작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군.”

“제가 하지도 않은 일로 겁을 먹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아실리 공작은 지금까지 궁금했던 것을 에린에게 물었다.

“경은 참 신기하군, 혹시 기억하나? 경이 어렸을 때 우리가 만난 적이 있어. 그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시간이라…….”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아실리 공작은 에린에게 물었다.

“경은 정말 아카데미에 온 뒤부터 검을 배우기 시작한 건가?”

“아니요, 공작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검술을 연마했습니다.”

의아함을 느낀 공작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렇군……. 대련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예전 마물 토벌 때 마물 떼를 해치운 것도 경인가?”

에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중 몇몇은 불신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녀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가 처음 아텐츠 아카데미에 왔을 때도 이러한 시선을 받았었다.

에린은 그들의 시선 아래에서 고개를 당당히 들고 그녀의 검을 잡았다.

그런 다음 대답했다.

“네. 제가 마물 떼를 해치웠습니다.”

* * *

제1 기사단은 두 주먹을 쥔 채 공작과 에린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석 기사의 두 눈은 뜨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에린이 곧이어 하는 말을 듣고, 기사들은 그녀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 부탁이 있습니다.”

“…….”

“대련에서 제가 공작님과 호각으로 붙거나 이긴다면 소원을 들어주세요.”

“그것참 재밌는 제안이군.”

“…….”

“좋다. 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아실리 공작과 호각으로 붙거나 대련에서 이긴다? 만약 정말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제국 최고의 기사의 앞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감히, 그런 말을 꺼내다니.”

한 기사단원의 말에 수석 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런 말을 꺼낼 때가 아니야. 기사는 실력으로 말하는 거다. 만약 에린 경이 그만한 실력을 보여 준다면, 우린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없어.”

“…….”

“나이로 실력을 판단할 순 없으니까.”

수석 기사의 말에 기사단원들이 침묵했다. 그 모습에 수석 기사는 어딘가 뿌듯함을 느꼈다.

‘좀 멋졌을지도.’

평소 아실리 공작의 모습을 보고 따라 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앞을 주시했다.

아실리 공작과 에린의 대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짜 소드 마스터라고?”

“믿을 수가 없군.”

“내가 저 나이 땐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치지도 못했어.”

제1 기사단이 침음을 내뱉었다.

에린의 검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오러가 보였다.

아실리 공작도 에린을 따라 검에 마나를 담았다.

솔직히 말해서 수석 기사는 둘의 대련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실리 공작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는 것 외에, 제대로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레옹 백작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단하군.”

그건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가, 한없이 느려지기도 했다.

에린이 밀릴 때도 있었고, 아실리 공작이 밀릴 때도 있었다.

그녀가 놀라운 속도로 아실리 공작의 턱을 후려쳤을 때, 구경하던 기사들은 일동 경악했다.

아실리 공작 역시 지지 않았다. 그의 검이 기이하게 휘어지며 에린의 팔을 길게 베었다.

수석 기사는 저 검이 자신을 향했을 때를 생각하며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수석 기사는 깨달을 수 있었다. 에린 리서스가 공작에게 했던 부탁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란 걸.

* * *

공작이 에린을 내려다봤다.

먼저 지쳐서 쓰러진 건 에린이었다. 하지만 그건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에린의 체력이 그녀의 경지에 비해 지나치게 약할 뿐이었다.

마나를 이용하면 억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테지만, 대련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둘은 대련을 멈춘 상태였다. 공작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는 에린을 보며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대단한, 재능이구나. 이건…….”

“…….”

“아니, 아니다. 재능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상해, 에린 경. 경과 검을 나눌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

“경은 최소 수십 년은 검을 휘두른 사람 같아…….”

에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딱히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작은 잠시 동안 두 눈을 감고 대련의 여운을 즐겼다.

먼저 입을 연 건 에린이었다.

“제가,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게 증명이 됐을까요?”

“어차피 믿지 않았다. 흑마법을 이용한다고 소드 마스터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

“그 말을 꺼낸 얼간이들도, 경이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몰라서 그따위 누명을 씌운 거겠지.”

아실리 공작의 말에 수석 기사가 “황실 모독죄…….”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공작은 자신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는 듯 에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옹 백작의 일은 걱정하지 말도록, 황제께서도 사건이 사건인 만큼 큰 벌을 내리지 못하실 거야.”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공작은 에린에게 피해가 가게 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경은 소드 마스터다. 레옹 백작이 없어진 이상, 제국의 힘이 되어 줄 새로운 소드 마스터를 박해하진 않으시겠지.”

“…….”

“황궁에 가 정식으로 인정받으면 된다.”

에린은 아실리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평생을 검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황제의 기사였다.

중립파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실리 공작과 대련하기 전, 그에게 부탁을 들어 달라고 말한 건 이유가 있었다.

“공작님과 비등하게 싸웠으니 제 말을 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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