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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88화 (88/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88화

‘소드 마스터가 자기 몸도 통제하지 못하다니.’

하지만 에린은 페르딘의 앞에만 서면 자신이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잊고 과거의 저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전…… 페르딘 경이 정말 잘못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너무 무서웠어요. 에린은 그 말을 삼켰다. 더는 바보같이 투정 부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페르딘이 떨고 있는 에린을 껴안았다. 허락을 받지 않았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눈물만 쏟아 내는 그녀가 안타까워서 참을 수 없었다.

대체 그가 뭐라고 이렇게 슬퍼하는가. 에린은 온전히 가지고 있는 둘의 기억이 그에게는 없었다.

떠올리려고 노력을 해도 마치 안개가 가린 듯 뿌옇기만 했다.

페르딘은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해 미안했다.

“다치시면 안 돼요, 페르딘 경. 절 혼자 두고 떠나시면 안 돼요.”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고 얘기한 후로, 에린은 이제 페르딘을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모두를 지켜 낼 거니까. 그런 다음 진짜로 그와 함께할 것이다.

페르딘은 에린이 안심할 때까지 그녀의 귓가에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절대로 떠나지 않을게요, 에린 경.”

에린이 더는 몸을 떨지 않을 때까지 계속, 계속 속삭였다.

* * *

아실리 공작은 걸음을 옮겼다.

“제2 기사단의 기사가 말하길 레옹 백작님이 확실히 에린 경을 감옥에 가뒀다고 합니다.”

그 기사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아실리 공작은 서둘러 아카데미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마나 제어석으로 이루어진 철창이 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마나 제어석 앞으로 다가갔다.

뒤따라 들어온 기사단원들은 그 충격적인 광경에 웅성거렸다.

“마나 제어석 근처에만 있어도 이렇게 소름이 돋는데…….”

“에린 경이 저렇게 만들었다고?”

“제2 기사단의 말대로 그녀가 소드 마스터라는 거야?”

“가만, 에린 경이 올해 몇 살이랬지?”

아실리 공작은 마나 제어석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는 손을 마나 제어석에 가져다 댔다.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에린이 정말로 마나 제어석을 구부러뜨린 거다.

아실리 공작의 낮은 웃음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공작님?”

“참 대단하지 않은가?”

“네?”

“이걸 보아라, 순수하게 마나를 이용해 마나 제어석을 휘어지게 했어.”

“…….”

“일이 년의 시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수석 기사의 두 눈에 의문이 담겼다. 아직 그의 경지로는 읽어 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당장 에린 경을 찾으러 간다.”

* * *

아실리 공작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딸을 바라보았다.

공녀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들어갈 수 없어요, 아버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공작은 그 말을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딸, 아실리 공녀였다.

“나는 에린 경을 죽이라는 황명을 받았다.”

“알아요, 하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명령을 받은 이상 어쩔 수 없단다, 딸아.”

공녀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에린과 페르딘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모두 확인하고 오셨겠지.’

레옹 백작의 시신과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자가 누구인지 공작은 알고 있을 터였다.

“멋대로 들어가시면, 어머니에게 이를 거예요.”

공녀의 말에 아실리 공작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그의 뒤에 있던 제1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아실리 공작은 사실 엄청난 애처가였다.

아실리 공작은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레옹 백작이 죽었다.”

“…….”

“아카데미 내에서 벌어진 일이지. 나는 폐하께 에린 리서스가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고 들었어.”

공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감옥에 그녀는 없었다.”

“…….”

“내가 목격한 건 마나 제어석으로 만들어진 철창이 휘어져 있는 거였지.”

공작의 뒤에 있던 제1 기사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에린이 누명을 쓴 거라 해도 황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제국의 소드 마스터를 죽이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억울할지도 모르나 정당한 절차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 제국인이라면 응당 따라야 하는 제국의 법도였다.

“제2 기사단원이 에린 경이 소드 마스터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녀가 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그들의 말을 증명하고 있어.”

아실리 공작은 처음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아직 덜 단련된 에린의 몸을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히 에린의 존재는 의문투성이였다.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기사 중 그녀 정도로 몸이 단련되지 않은 기사가 존재했던가.

“에린 경은 숨기고 있는 게 있다. 그리고 나는 그걸 확인해야 해.”

공녀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공작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황제는 악에 물들어 있어요. 그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뇌 속에 악마가 있다고요!”

공녀의 말에 기사단의 기사 중 몇몇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행동은 명백히 황실 모독죄였다.

아실리 공작은 낮은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기억에서 지워라.”

“알겠습니다!”

아실리 공작은 공녀에게 주의를 시키려고 했다. 아무리 아버지와 그의 기사단 앞이라도 황실 모독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말을 하려는 그때, 공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공녀가 휘청였다.

이제까지 미래를 발설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아실리 공작은 놀라서 공녀에게 달려갔다. 그가 공녀의 몸을 붙잡았다.

“괜찮으냐?”

공녀는 분한 듯 중얼거렸다.

“젠장, 악마를 악마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여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

“죽어라, 이 악마…….”

아실리 공작은 머리를 짚은 채 고개를 저었다.

가끔 자신의 딸이 거친 어투를 사용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입은 살아 있는 것 보니, 괜찮은가 보구나.”

그때였다. 닫혀 있던 의무실의 문이 열렸다. 공녀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의무실에서 나오는 사람을 확인한 공녀는 아실리 공작의 품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이 멀쩡해 보여서 공작은 어쩐지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에린 경, 페르딘과 대화하고 있지 않았나요?”

“페르딘 경이 잠드셔서 나왔어요. 아직 회복이 덜 되셨으니까요.”

공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드 마스터인 에린의 청각은 매우 뛰어날 게 분명하다.

의무실 밖에서 이뤄진 그들의 대화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에린 경, 오랜만이군.”

에린은 묵례를 한 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실리 공작은 자신의 앞에 선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소드 마스터라니…….’

그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처음 검을 잡았을 때부터, 아카데미에 들어가 졸업을 하고 지금의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세상을 호령하는 천재라는 사람들도 그의 앞에 서면 작아지고는 했다.

세상이 쉽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쉬워도 너무 쉬웠다.

그래서 지루해졌다.

검을 연습하는 건 습관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꾸준히 행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래, 모든 건 다 변명이다.’

아실리 공녀에게 했던 말은 사실 변명이었다.

레옹 백작이 죽었을 때 그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발전을 잊은 기사에게 그가 줄 관심은 없었다.

‘어떻게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탐욕스러운 놈이니, 그만한 잘못을 저질렀겠지.’

공작이 관심이 있는 건,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에린이었다.

아실리 공작은 에린이 승급전을 떠나기 전에 그녀와 했던 대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왜 몰랐을까?”

아실리 공작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에린은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제가 공작님의 경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요.”

공작은 에린의 대답에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군, 에린 경. 결백을 증명할 수 있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겠지?”

아실리 공작의 말대로, 그녀는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었다.

공작의 말에 공녀가 그를 가로막았다.

“안 돼요! 에린 경은 레옹 백작과 결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공녀님. 저도 원하는 일입니다.”

에린은 아실리 공작의 두 눈에서 호승심을 읽었다. 안 그래도 그녀 역시 승급전을 치르기 전 했던 대련이 만족스럽지 않던 참이었다.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대련을 하는 것 자체가 그를 모욕하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에린은 한쪽 팔을 접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공작님. 저와의 대련을 부탁드립니다.”

에린의 대답에 공작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가 에린을 향해 말했다.

“이번 대련은 제1 기사단이 함께할 것이다. 그곳에서 당신의 결백을 증명하도록, 에린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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