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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87화 (87/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87화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서쪽 숲의 공터에 도착한 수석 기사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아실리 공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깊게 파인 땅이 보였다.

아실리 공작은 한 눈에 그것이 검기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챘다.

“소드 마스터가 죽었다.”

“레옹, 레옹 백작님이…….”

아실리 공작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뒤를 쫓아온 기사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제국의 단 셋뿐이던 소드 마스터가 둘이 되었다.

“한심한 놈이긴 했지만 그래도 소드 마스터일진대…….”

아실리 공작에게 수석 기사가 다가와 말했다.

“제2 기사단 중 죽은 이는 없습니다. 다들 기절시킨 듯합니다.”

아실리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사들이 제2 기사단을 살피는 게 보였다.

죽은 자는 레옹 백작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히려 그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수석 기사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죽이는 것보다,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게 더 힘든데…….”

수석 기사의 말대로였다. 죽이는 것보다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게 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자는 레옹 백작을 죽이고, 제2 기사단의 기사들은 살려 두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아실리 공작은 생각에 잠겼다.

그 또한 레옹 백작을 해치우고 제2 기사단을 전부 기절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왜 하필 레옹 백작만 죽였을까. 만약 레옹 백작까지는 제압할 수 없어 그를 죽인 거라면 자신보다 약한 것이리라.

수석 기사가 걱정된다는 듯 아실리 공작에게 질문했다.

“레옹 백작을 죽였다는 건 그자가 제국의 적이란 뜻일까요?”

“아니, 그건 아닐 거다.”

“…….”

“제국의 적이라면, 이놈들을 살려 둘 리가 없지.”

“확실히, 목격자를 가만둘 리가 없죠……”

아실리 공작의 두 눈이 깊어졌다.

“확인해 보면 되겠지.”

그는 쓰러져 있는 제2 기사단원의 몸에 마나를 살짝 주입했다.

“헉!”

그 순간, 기절해 있던 기사단원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겁에 질린 채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끔찍한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덜덜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이어 아실리 공작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냐.”

그의 말에 제2 기사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에…… 에린 리서스가…….”

에린 리서스? 설마 아실리 공작님이 도착하기 전에 백작이 형을 집행하려 한 건가.

수석 기사가 아실리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아실리 공작의 얼굴은 이미 무섭게 굳어 있었다.

“에린 리서스가 소드 마스터였습니다. 그녀가…… 그녀가 레옹 백작님을 죽였습니다.”

* * *

에린은 페르딘의 옆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피로 범벅이 된 채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은 그녀를 더욱 안쓰러워 보이게 했다.

“곧 깨어날 거예요.”

공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의무실의 신관들이 찾아왔지만, 공녀는 그들을 만류하고 자신의 신성력을 사용했다.

데렉은 공녀가 아몬을 치유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확실히 성녀의 힘은 놀라웠다. 그녀가 아몬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자, 밝은 빛이 나며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얼마 전부터 그의 머릿속에서 망가져 있던 공녀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공녀가 에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신성력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신성력을 너무 사용하는 것도 좋지 않죠.”

“…….”

“이 정도면 자가 치유로 충분할 거예요.”

에린은 공녀의 말을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다시 한번 페르딘의 심장이 뛰는지 확인했다.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에린은 다행이라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님은 괜찮으신가요?”

에린의 질문에 공녀가 옅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흐릿한 미소였다.

그녀는 에린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럼요. 전 괜찮아요, 에린 경. 에린 경이야말로 다치셨네요. 그 악독한 인간을 상대하느라 고운 손에 상처가 났어요.”

“…….”

“그 인간은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여신님은 용서를 모르시는 분이니까요.”

“…….”

“지옥에서 영원히 괴롭힘당할 겁니다.”

성녀의 말을 들은 데렉의 얼굴이 묘해졌다. 여신님이 그런 분이셨나……? 신전에서 말하길 여신님은 자애로운 분이랬는데? 아니, 애초에 성녀가 여신님에게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공녀가 에린의 손을 붙잡고 신성력을 사용했다. 따뜻한 기운이 맴돌며 그녀의 상처가 순식간에 나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공녀가 휘청거렸다. 에린은 놀란 듯 공녀를 부축했다.

“공녀님!”

데렉 역시 놀라서 달려왔다.

“전 괜찮아요, 에린 경, 데렉 경.”

에린은 공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공녀가 에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전 정말 괜찮아요. 에린 경. 덕분에 다 괜찮아졌어요.”

“…….”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예요.”

그 순간 공녀의 동공이 수축했다. 에린은 그런 공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이제 일어나겠네요.”

공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페르딘이 눈을 떴다.

* * *

눈을 뜨자 페르딘의 두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에린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의무실에 있는지 떠올리려 했다.

마지막 기억은 레옹 백작의 공격에 당해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데렉이 그를 찾아왔고, 에린이…….

에린이 나타났다.

그런 다음은 암전이었다.

대체 어떻게 의무실까지 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에린 경? 몸은 괜찮나요? 레옹 백작은 어떻게 됐죠? 혹시 레옹 백작과 대적하신 건가요?”

공녀가 페르딘을 보며 혀를 찼다.

“페르딘 렉시아, 진정해.”

공녀가 얼굴을 구겼다.

“난 보이지도 않지?”

“아, 공녀…….”

“됐어. 뼈 빠지게 살려 줘 봤자 소용이 없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공녀가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다 괜찮은 겁니까?”

“난 괜찮아. 에린 경이 약간 다쳤는데…….”

공녀의 말에 페르딘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몸을 덮은 이불을 치우며 당장이라도 일어나 에린에게 다가오려 했다.

“너 미쳤어? 지금 네 몸 상태 몰라서 그래? 최소 몇 주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어야 한다고!”

공녀가 그런 페르딘을 다시 눕혔다.

“레옹 백작, 그 인간은 널 진짜 반쯤 죽이려 했어.”

“실제로 죽이진 못했겠죠.”

“그래, 하지만 어느 한 곳을 절단할 수는 있었겠지.”

공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의무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뭐, 뭐야!”

데렉이 깜짝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다들 못 느꼈어?”

데렉의 말에 공녀가 힐끔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린을 살폈다. 공녀는 그 기운의 출처가 에린이란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페르딘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이 답답한 두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공녀는 이내 안타까운 얼굴로 에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행입니다. 레옹 백작이 당신을 다치게 할까 봐, 너무 걱정했습니다.”

페르딘은 에린이 다쳤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에린이 다쳤다는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레옹 백작은 소드 마스터였다.

아무리 그녀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그를 상대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만약 공녀의 예언이 아니었다면 페르딘은 에린을 절대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녀님이 전부 치유해 주셨어요. 애초에 다친 곳도 별로 없었어요.”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였다.

“또 당신께 짐을 지운 거 같아요…….”

“아니요, 카론을 구해 주시려 한 거잖아요.”

“…….”

“정말 감사해요, 페르딘 경. 경이 아니었다면 카론은 큰일이 날 뻔했어요. 그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에린 경이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공녀가 데렉을 잡아끌었다.

“공녀님?”

“데렉 경, 빨리 나오세요. 중요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데렉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갔다.

카론과 다른 이들은 옆방에 있었기에 이제 방에는 에린과 페르딘밖에 남지 않았다.

공녀가 떠나자마자 에린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숲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페르딘을 보자 과거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랐었다.

그가 죽고, 폐인이 된 채 후작성에서 매일 울었던 그때 그 기억이.

또다시 그런 아픔을 겪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끔찍한 나락에 빠진 것만 같았다.

‘아니야, 그는 괜찮잖아. 내 앞에 살아 있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페르딘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러지 말자고 다짐해도 몸이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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