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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86화 (86/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86화

제2 기사단의 몇몇은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레옹 백작도 그들을 따라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당황한 것과 다르게 에린은 태연했다.

그녀는 데렉을 돌아보며 말했다.

“데렉 경, 제 친구들과 함께 다친 분들을 의무실로 데려가 주세요.”

데렉과 초급반의 학생들은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전히 경이로운 일이었다.

레옹 백작은 그런 에린의 향해 검을 들었다.

“내가 결백하단 건 증명한 거 같은데?”

“이…… 건방진…….”

레옹 백작은 인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저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아실리 공작도 삼십 대 중반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이건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나는 황명에 따른다. 에린 리서스, 넌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다.”

“…….”

“저놈들도 마찬가지야. 카론 리서스와 네놈들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에린은 잠시 하늘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당신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어.”

* * *

페르딘과 대화 이후 에린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기로 완전히 마음을 정했다.

레옹 백작은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을 가지고 놀았다.

게다가 감히, 페르딘을 다치게 했다.

‘그의 몸에 상처를 입혔어.’

에린은 진정을 하려고 노력했다.

살의로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레옹 백작에게 페르딘이 당한 일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에린 경, 아몬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더 늦는다면…….”

아몬의 상태를 살피고 있던 데렉은 비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초급반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떠나세요.”

에린의 말에 필립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지금 그들이 에린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페르딘과 그의 기사들을 의무실로 옮기는 일뿐이었다.

“젠장, 꼴사납군.”

“…….”

“이곳에 남아서 널 도우면 안 되는 거겠지?”

에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필립. 이곳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레옹 백작은 그 말을 듣고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오만하구나, 에린 리서스!”

에린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레옹 백작은 그녀를 보며 아실리 공작을 떠올렸다.

그 재수 없는 인간도 그에게 에린같이 굴고는 했다.

하지만 그건 아실리 공작이라 용납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린이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됐는지 모른다.

‘지금 없애 놔야 해.’

이십 대 초반에 소드 마스터.

위협적인 존재였다.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인 아실리 공작의 존재만으로도 중립파는 상대하기 버거운 세력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2황자를 지지한다면?

그것도 황제가 이미 리서스 후작가에게 흑마법을 사용했다 누명을 씌운 뒤였다.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아직은 내가 강할 것이다.’

아실리 공작과 자신의 실력 차이가 있듯 같은 경지더라도 격이 존재한다.

이제 겨우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에린 리서스가 그보다 강할 리는 없었다.

레옹 백작은 에린을 살폈다. 언뜻 보기엔 그저 평범한 여자처럼 보였다.

평균보다 작은 키에 단단해 보이지 않는 몸. 하지만 겉모습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순 없었다.

소드 마스터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에린 리서스를 해치우고, 목격자도 전부 처리한다.’

에린이 소드 마스터란 사실 자체가 리서스 후작가와 얽힌 이야기에서 사라져야 한다.

레옹 백작은 시선을 돌렸다.

데렉과 초급반의 예비 기사들이 페르딘과 그의 기사단원들을 챙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데렉 아테른, 내가 보낼 생각이 없다고 했을 텐데?”

레옹 백작의 말에 제2 기사단 역시 데렉을 막아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데렉을 막아선 제2 기사단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콰앙!

에린이 마나를 담은 검을 땅에 깊숙이 박아 넣자 기괴한 소리가 나며 그들의 앞에 땅이 크게 갈라졌다.

제2 기사단 모두 뒷걸음질 쳤다.

몇몇 이들은 신음성을 내뱉기도 했다.

“가, 가능한 일이야?”

“이게 대체 무슨…….”

엄청난 일을 저지른 에린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데렉과 초급반의 예비 기사들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그들은 에린이 시간을 벌어 준 틈을 타 달려 나갔다.

“저런 건방진……!”

레옹 백작의 두 눈이 형형해졌다. 그는 도망치는 이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에린의 검이 더 빨랐다.

그녀의 검은 예고 없이 날아들었다. 만약 그가 순간적으로 몸을 굴리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를 공격이었다.

“이런, 치사하기 짝이 없는…….”

레옹 백작의 말에 에린은 입을 열었다.

“웃기네.”

“뭐라?”

“소드 마스터가 되어서, 자신보다 약한 기사들을 핍박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닐 텐데.”

그렇게 말한 에린은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눈빛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자신의 사람들에게 보이던 따뜻한 눈빛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눈 안에 겨울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살이 에일 듯한 강렬한 추위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냥 내버려 뒀다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

“대체 왜 내 사람들을 건드리는 걸까? 왜 날…… 계속…….”

레옹 백작은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분노에 찬 목소리와 다르게 에린의 고운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마치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 같았다.

에린 리서스가 본색을 드러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괴…… 괴물…….”

그녀를 보고 있는 제2 기사단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은 듯, 페르딘과 그의 기사단이 사라지자마자 에린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체 이 살기는 뭐지?’

백작은 생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에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공작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수석 기사의 질문에 공작은 알 수 없는 얼굴로 허리춤에 걸린 검을 바라보았다.

아실리 공작은 지금 기사단을 이끌고 아카데미로 향하는 길목에 멈춰서 있는 상태였다.

그는 쉽사리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수석 기사 역시 그런 아실리 공작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공작님이 마음에 들어 하신 인재였는데.’

공작은 에린을 매우 흡족해했다.

그녀와 대련한 이후엔 가끔 그때를 떠올리는 듯 아련한 눈을 하기도 했다.

수석 기사는 그런 에린을 질투했지만, 결코 그녀가 이러한 상황에 처하길 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공작에게 인정받는 에린을 보면서 스스로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언젠가 나도 공작님과 대련을 해 인정받겠다.’라고.

기사로서 언젠가 그녀를 꺾고 싶었지, 이런 식의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글쎄. 잘 모르겠군.”

그는 에린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황제의 말대로 그녀가 흑마법으로 강해졌다고 한다면, 에린을 처단해야 하는 게 맞았다.

흑마법을 사용한 자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기사들은 흑마법을 사용해 마물로 변하면, 자신의 영혼까지 타락하는 거라 믿었다.

“하지만 리서스 후작은 그런 짓을 할 리 없다.”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나 그나, 좋은 부모는 되지 못했지만…….”

“…….”

“결코 딸에게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아실리 공작의 시선은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순간, 공작이 얼굴을 굳혔다.

“공작님?”

수석 기사가 놀란 듯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자가…….”

공작은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자가 나타났다.”

“네?”

“마물 토벌 때 나타났다던 소드 마스터, 그자가 확실해. 소름 돋을 정도로 강렬한 살기다.”

수석 기사는 너무 놀라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공작의 말을 들은 제1 기사단도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자가…… 등장했다니?”

“그럼 정말 토벌대에 참가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는 거야?”

“엄청난 살기…….”

엄숙해야 할 기사단의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만큼 ‘그자’의 존재는 제1 기사단의 기사들에게 있어 크나큰 관심거리였다.

제국의 삼 대 소드 마스터 말고, 또 다른 소드 마스터.

다른 왕국의 이일지, 아니면 숨어 있는 실력자인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적일지 아군일지도 알 수 없는 존재에 기사단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그자가 지금 아카데미에 있단 말입니까?”

“그래.”

공작은 빠르게 아카데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운 사실에 넋을 놓고 있던 수석 기사도 서둘러 그를 따라 움직였다.

아카데미 안에 들어간 아실리 공작의 걸음은 더욱 거침이 없었다. 수석 기사는 몇 번쯤, 그를 놓칠 뻔했다.

아실리 공작은 평소 기사들을 배려하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배려를 잊을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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