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84화
그녀의 검에 마나가 담기기 시작했다. 희뿌연 마나가 형체를 이뤘고, 그것은 곧 오러가 되었다.
소드 마스터만 만들 수 있다는 안정적인 마나의 빛이 눈앞에 보였다.
데렉과 초급반의 학생들은 그 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에린을 바라보았다.
* * *
페르딘은 자신이 무모한 선택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몬과 헬릭스가 강한 편이라고 하나 상대는 레옹 백작이었다.
하지만 카론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에린의 가족이기 이전에 그의 기사였다.
그는 이곳으로 떠나기 직전 공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페르딘이 카론의 소식을 듣고 바로 떠나려고 할 때였다. 공녀가 그를 찾아왔다.
“레옹 백작을 막으러 가는 거야, 페르딘?”
“공녀? 어떻게 알았지?”
“위험한 일이야.”
“알고 있어. 하지만 카론은 나의 기사이자 약혼녀의 동생이야.”
“난 이래서 당신이 싫어. 멍청하고, 착하고, 고지식해…….”
“미안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하지만 그래서 에린 경이 당신을 좋아하는 거겠지.”
아실리 공녀를 바라보는 페르딘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공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신께서 내게 몇 가지의 미래를 보여 주셨어, 페르딘.”
“무슨 뜻이지?”
“그곳에 가게 된다면, 너를 제외한 네 예비 기사단원들은 전부 죽어.”
공녀는 몸을 벌벌 떨면서 말했다. 그녀의 두 눈은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아실리 공녀는 자신이 본 미래를 떠올렸다.
“내가 에린 경을 찾아갈게. 데렉을 서쪽 숲으로 데려가선 안 돼. 그에게 초급반의 기사들을 데리고 에린 경을 만나라고 시켜. 그에게 길 안내를 부탁해.”
“…….”
“에린 경을 찾고 떠나면 늦어.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해.”
말을 마친 공녀가 휘청거렸다. 페르딘은 그런 공녀의 팔을 붙들었다.
“만약 데렉이 당신을 따라가게 된다면, 무조건 죽게 될 거야. 그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 약해.”
“당신 더 이상 말한다면…….”
“페르딘 렉시아, 내 말을 들어. 지난번에 이미 말했잖아, 어차피 난 죽을 목숨이었어.”
“…….”
“아몬 경에게 레옹 백작을 도발하라고 해. 그는 단순한 자니까 넘어올 거야.”
공녀가 고개를 저었다. 갈수록 안색이 파리해졌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야. 그는 악에 물들어 있어. 신께선 그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하지만 그 이전에…… 당신의 기사단이 죽어선 안 돼.”
“공녀?”
“카론 경이 죽는다면, 에린 경은…….”
“…….”
“위험하다고 에린 경을 부르지 않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
페르딘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으니까.”
“…….”
“그녀는 혼자 있을 때 더 강해질 수 있어.”
그 순간, 공녀의 동공이 수축했다. 처음 들어 보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로 공녀가 입을 열었다.
“페르딘 렉시아, 과거 너와의 약속을 통해 힘을 빌려줄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다.
공녀는 그 말이 끝나자 더 지친 모습이 되었다. 그녀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는 뒷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페르딘은 그녀가 에린을 찾으러 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공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왜 공녀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변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말한 과거 약속이 무엇인지.
하지만 어렴풋이 그게 에린이 겪었다던 그때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페르딘은 앞을 응시했다.
레옹 백작이 가소롭다는 듯 그의 예비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건 레옹 백작이었다. 그는 그대로 카론의 목을 내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카론이 몸을 굴렸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움직임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대로 목이 날아갔으리라.
레옹 백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다시 일 검을 내질렀다.
살기가 가득한 검은 또다시 카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자 헬릭스가 레옹 백작에게 달려들어, 그의 검을 막아 냈다.
“크윽!”
고작 검을 한 번 막은 것뿐인데도 헬릭스는 속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만약 레옹 백작이 진심으로 공격을 했다면 그는 바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사이 아몬이 카론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는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검을 카론에게 건넸다.
“검을 들어, 카론 리서스. 죽더라도 발악하고 죽어야 해.”
아몬의 말에 카론이 검 손잡이를 꽉 쥐며 말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작이 조소했다. 그가 자신의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놈들은 나서지 마라.”
아몬은 그 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하긴 뭐, 소드 마스터이니까. 우리쯤은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겠지.”
레옹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검을 든 채,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굳이 검에 마나를 두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싶다면 그들의 소원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가지고 놀다 죽여 주지.’
페르딘은 죽이지 못해도 그의 예비 기사단원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카론은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도 된다는 디트리온의 명이 있었다.
처음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아몬이 그를 자극한 게 컸다.
레옹 백작은 소드 마스터가 되고 나서 자신에게 건방지게 군 인간을 살려 둔 적이 없었다.
아몬은 헬릭스를 보며 말했다.
“헬릭스, 네놈. 에린과 서부에서 뭘 하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번보다 강해졌다는 건 알겠어.”
“…….”
“얼마나 버틸 수 있어?”
“협공한다면, 10분.”
“젠장, 우리 전부 다 약해 빠졌군.”
헬릭스는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아몬의 말대로, 서부에서 깨달음을 얻은 헬릭스는 조금 더 강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소드 마스터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와 아몬이 협공해도 십 분이었다. 과연 에린이 그 시간 안에 이곳에 올 수 있을지 헬릭스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헬릭스는 몸을 날렸다.
* * *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레옹 백작은 말 그대로 페르딘의 기사단을 가지고 놀았다.
아몬은 절대적인 힘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에린이 대련을 할 때 자신을 얼마나 배려했는지 깨달았다.
상처는 갈수록 늘어났고 레옹 백작의 입에 걸린 미소는 진해졌다.
제일 먼저 쓰러진 건 카론이었다.
카론은 레옹 백작에게 배를 걷어차인 뒤,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백작은 그를 죽일 수 없었다.
페르딘이 검으로 백작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시답잖은 상대에게 번번이 저지를 당하면 귀찮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레옹 백작은 지금 즐기고 있었다. 그가 전력으로 그들을 상대했다면 아무리 방해해도 카론을 죽이는 것쯤 전혀 어렵지 않았다.
“전하, 기사단의 수준이 형편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비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몬이 그의 검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도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 아몬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푹!
아몬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이제 그만하지. 재미가 없으니.”
복부를 찌른 레옹 백작의 검이 보였다.
‘마물 토벌 때 에린이 날 위해 등을 다쳤었는데.’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뒈지게 아프잖아.’
그때 에린에게 제대로 고맙다고 했었어야 했는데. 그 당시 단련되지도 않은 몸으로 이 아픔을 어떻게 감당했던 걸까.
죽기 직전이라 그런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몬은 헬릭스를 돌아보았다.
그의 꼴도 자신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온몸에 상처가 난 채로, 간신히 검을 붙들고 있었다.
“야, 헬릭스.”
“말하지 마십시오.”
“미안하다.”
“젠장.”
“전하를 부탁한다.”
아몬은 그대로 쓰러졌다.
헬릭스는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레옹 백작은 그런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기사들이 입만 살았군요. 실제 실력은 형편없는데 말이지요.”
그는 털썩 쓰러진 헬릭스를 향해 검을 날렸다. 이번엔 살기가 담긴 검이었다.
챙!
레옹 백작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페르딘이 그의 검을 막아 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검술 실력이 많이 느셨군요, 전하.”
“당신이 형님의 검술 스승으로 갔던 그때가 한참 전입니다. 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죠.”
“그렇죠. 디트리온 전하가 절 원하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레옹 백작은 웃었다. 그는 검을 막아 낸 것만으로도 페르딘이 한계에 다다른 것을 눈치챘다.
“페르딘 전하, 예비 기사들이 전부 쓰러진 지금, 이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페르딘은 대답 없이 검을 든 채, 레옹 백작을 향해 겨눴다.
그러자 백작은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