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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82화 (82/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82화

“…….”

“어쩌면 에린 경과 다시 만날 무렵 보석의 색이 바뀐 것도 어떠한 인연일 수 있겠지요.”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에린은 자신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밋밋한 녹색 보석이 달린 수수한 목걸이.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 * *

그날 저녁.

어둠이 내려앉자 에린은 눈을 떴다. 그녀는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감옥 앞을 지키는 기사의 수는 열 명. 그리고 감옥 밖에서 아카데미 안쪽을 감시하는 기사단도 있었다.

기사단은 아까 본 레옹 백작의 제2 기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레옹 백작은 없을 듯하고.’

에린은 마나 제어석으로 이루어진 창살을 바라보았다. 창살은 단단했으나 힘으로 못 구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창살을 붙잡았다. 다른 기사들이 봤다면 경악을 할 행동이었다.

마나 제어석으로 이루어진 창살을 맨손으로 잡다니? 마나 제어석을 만지는 순간 제어석에 마나를 빼앗기게 된다.

그렇기에 소드 마스터 급의 기사가 아니라면 마나 제어석을 만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린의 행동은 창살을 붙잡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갇혀 있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철창에서 나온 에린은 그대로 걸어 나갔다. 졸고 있던 기사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다.

“헉…… 헉, 누구…….”

에린은 간단한 손짓으로 그를 제압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그저 시작일 뿐이다.

에린은 기절한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발견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검을 들어 올렸다.

어쩐지,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아카데미에 처음 와 검을 잡았던 그때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각오의 무게일지도 모르겠다고 에린은 생각했다.

그녀는 검을 든 채, 감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누구냐?”

“에린 리서스? 대체 어떻게 나온 거지?”

에린이 그곳을 나서자마자, 기사들의 당황한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상대의 동요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고요했다.

에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일 대 다수의 대결이었다.

상대는 제2 기사단.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죽인다!”

에린은 조용히 먼저 검을 내질렀다.

차앙!

맑은 소리가 나며, 그녀에게 검을 휘두르려던 기사의 검이 반으로 동강이 났다. 그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뭐, 뭐야?”

“흑마법을 이용했단 게 사실이었나?”

“생포는 포기한다. 죽여!”

다수의 기사가 진을 맞춰 그녀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에린은 말없이 검을 움켜잡았다.

제2 기사단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녀를 상대하려면, 최소 소드 마스터가 와야 했다. 에린의 검에 기이한 마나가 서렸다.

그녀의 검과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마나를 보며 기사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의를 잃은 모습이었다.

“소드 마스터?”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사술이 분명하다. 에린 리서스의 나이를 생각해 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잖아.”

제2 기사단은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쉽사리 에린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이미 전의를 잃은 적을 상대하는 건 쉬웠다. 에린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검이 하나씩 부러졌다.

도망치려는 기사도 몇 있었지만 얼마 안 가 그녀에게 목덜미를 얻어맞고 기절했다.

에린은 망설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다리에 휘감고 달리는 모습은, 야생 동물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그대로 리서스 후작성으로 갈 생각이었다. 달려 나가는 길에 공녀를 보지 못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에린 경.”

에린은 자신의 앞에 있는 공녀를 바라보았다.

기사들이 최대한 다치지 않게 제압하려고 했지만, 그들에게 상처를 아예 입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볼을 한 번 훑은 후 손바닥을 내려다보자 피가 묻어 있었다.

에린은 공녀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 인간을 해치는 마물과 별다를 바 없을 것이다.

“공녀님, 비켜 주세요.”

에린의 말에 공녀가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눈물을 쏟아 냈다.

에린은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에린 경, 감사해요.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에린은 공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애처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물 토벌 때…… 다치면서까지 저를 지켜 주셨죠.”

아실리 공녀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두 눈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을 볼 때마다 말하고 싶었어요. 제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해요. 원래, 그때 끝났어야 할 목숨이었는데…….”

“…….”

“당신은 정말 상냥한 분이세요.”

아실리 공녀는 에린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신께서 그 광경을 보여 주신 뒤, 공녀는 언제나 에린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외로움에 떠는 그녀에게 내가 당신의 옆에 언제나 있어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정말 상냥한 사람이라고, 덕분에 지금 살아 있을 수 있었노라고. 그리고 내가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돕고 싶다고.

그리고 지금이 자신이 염원하던 그때란 걸, 공녀는 알 수 있었다.

쿨럭.

공녀가 피를 토했다.

놀란 에린이 달려오려 했지만, 공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곳의 오기 전 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계시 덕분에 에린이 지금 탈출을 감행할 거란 걸 알게 됐다.

공녀는 신이 그 광경을 보여 준 이유가 에린에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레옹 백작은 카론 경을 죽일 생각입니다.”

“…….”

“인질은 한 명으로 충분하니까요.”

말을 할수록 몸이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미래를 발설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페르딘과 기사단이 막으러 갔으나, 그들만으론 역부족입니다.”

“위치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카데미 서쪽 숲으로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공녀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를 부축하려 다가오는 에린을 향해 공녀가 고개를 저었다.

“어서 가서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세요.”

* * *

카론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제2 기사단이 찾아와 그를 방에 가두었다가 억지로 어딘가에 데려가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그가 이유를 물어도 기사들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카론이 요즘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는 하나, 아직은 검술 학부생이었다.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기사들이 속한 제2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도착한 곳엔 기사단의 기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의 최측근이라고 불리는 소드 마스터, 레옹 백작이 카론의 앞에 서 있었다.

소드 마스터라니. 그는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드 마스터들은 웬만한 일에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이 움직이는 건 황제가 직접적인 명령을 내릴 때뿐이었다.

레옹 백작은 카론을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나? 네 아버지, 리서스 후작이 죄를 짓고 도주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희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요?”

“정말 모르나?”

카론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에 레옹 백작이 그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후작성의 지하에서 흑마법을 사용한 정황이 발견됐다.”

“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지르셨을 리 없습니다.”

“카론 리서스, 이미 모든 증거가 나왔어. 에린 리서스가 사실은 검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 흑마법으로 강해졌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누님이?”

“그래, 그래서 갑자기 강해진 거지. 이제야 납득이 되지 않나?”

“…….”

“아무리 검의 선택을 받았다 한들, 갑작스럽게 강해진 게 말이 되질 않았지.”

“…….”

“애초에 검의 선택 따위 받지도 않았던 거다. 재능이 쥐뿔도 없는 악녀가 자신의 아비와 함께 모두를 능멸한 거야.”

카론의 두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제 가족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을 들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님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레옹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검의 선택이 끊겼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겠지.”

레옹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카론은 기사들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이상해.’

그가 알고 있는 아버지, 리서스 후작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리서스 후작처럼 제국에 충성하는 자는 흔치 않았다. 물론 그 충성심이 온전히 황제를 향한다기보다는 제국 자체에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 때문에 황제는 리서스 후작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도 후작의 충성심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카론은 얼굴을 굳혔다. 그의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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