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81화
“당신이…… 얼마나 쓰레기인지는 이미 알고 있어. 내가 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고.”
디트리온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 순간 감옥의 공기가 변했다.
무거운 압박감에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디트리온이 뒤를 돌아봤다.
에린은 감옥의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뭐지?’
섬뜩한 무언가가 가슴을 할퀴고 지나간 것 같았다.
마나라도 사용한 것인가?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나 제어석을 뚫고 기세를 뿜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신은 날 가지고 놀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
낮고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디트리온은 그 순간 알 수 없는 열기가 자신의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정말, 정말 재밌어.’
그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에린이 재밌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이전까지 이 재미를 몰랐을까?
역시 에린은 이대로 죽기에 너무 아까웠다.
“날 잘 알고 있구나, 에린 리서스.”
“…….”
“뭐, 상관없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의 말에 에린은 웃었다.
디트리온은 그녀의 웃음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디트리온, 모든 게 네 맘대로 되진 않을 거야.”
“…….”
“곧 찾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 * *
에린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디트리온이 떠나간 내내,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만약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계속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으리라.
“에린 경.”
페르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페르딘이 지금 이곳에 왔다고?’
디트리온이 아까 그녀를 비웃으며 했던 말처럼 페르딘은 그녀를 외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흑마법을 사용했다 의심받는 사람의 약혼자라면, 그것도 사이가 좋다는 말이라도 돌면, 심문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린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감옥에 들어온 사람은 페르딘이 맞았다.
그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페르딘 경? 여긴 어떻게…….”
“디트리온이 제가 이곳에 들어오는 걸 막지 않더군요.”
에린은 페르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걱정된다는 듯 문이 있는 방향을 살폈다.
페르딘은 그런 에린에게 덤덤히 말을 꺼냈다.
“문밖은 아몬이 지키고 있습니다.”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앞에 앉았다. 그는 에린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에린 경,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에린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에린은 손을 뻗어 페르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름다운 금발이 그녀의 손에서 흐트러졌다.
페르딘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페르딘 경, 경에게 모든 걸 말씀드리겠다 했죠.”
“…….”
“이런 상황에서 말하게 될지는 몰랐네요.”
페르딘은 에린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느꼈다. 이제까지의 에린과 무언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어쩌면 일련의 상황에 그녀가 놀란 것일 수도 있기에 그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에린 경이, 어떤 사람인지요?”
“네…….”
에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곤조곤 말을 하기 시작했다. 페르딘은 그녀가 자신에게 말했던 답을 주려고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페르딘 경, 경의 추측이 맞아요. 저는 미래를 겪고 과거로 돌아왔어요.”
순간 페르딘은 사위가 어두워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일 뿐 사실은 엄청난 살기가 주변을 스친 거였다.
에린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만약 그녀의 주변에 페르딘 말고 다른 이가 있었다면 비명을 내질렀을 것이다.
그만큼 에린에게서 쏟아진 기운은 매우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녀의 살기는 페르딘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
에린이 손을 뻗어 창살을 잡았다.
기본적으로 일반인보다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마나 제어석에 닿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에린은 그것에 타격을 받지 않았다.
“페르딘 경, 제가 레이먼을 죽였어요.”
페르딘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차분한 얼굴로 에린의 말을 듣고 있었다.
“레이먼 말고도 또 해치운 사람이 있어요. 그 순간…… 전 누군가를 지킨다기보다 복수하기 위해 검을 들었어요.”
에린의 말은 덤덤했다.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절 지독하게 괴롭혔어요. 그래서 전…….”
“…….”
“전 멈출 생각이 없어요. 이렇게 한곳만을 보고 나아가다 어쩌면 경의 곁에 있는 소중한 것마저 제가 해칠지도 몰라요.”
“…….”
“전 디트리온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뿐만이 아니라…… 제 소중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전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끔찍하게 복수할 거예요.”
에린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페르딘은 에린과 디트리온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에린을 자극한 건 확실해 보였다.
“전하는 제가 착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하께서 보셨던 과거의 멍청하고 착해빠진 여자는…….”
이미 첫 번째 삶에서 죽었다. 에린은 일부러 마지막 말을 하지 않고 잠시 말을 골랐다.
“정말, 끔찍하게 복수할 거예요.”
디트리온이 나가고 나서 그녀는 이 한 가지를 결심했다.
더는 힘을 숨기는 게 의미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복수의 대상은 명확해졌다. 그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도 이제 밝혀졌다.
더는 그녀의 아버지를 위험하게 둘 필요도 없었다.
그녀에겐 이제…… 복수를 실행할 일만 남아 있었다.
페르딘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린은 그가 자신을 나쁜 인간이라 비난해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제 참지 않기로 했으니까.
“힘드셨겠군요, 에린 경.”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손을 붙잡았다.
“많이, 힘드셨을 거 같아요.”
에린은 철창을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린은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페르딘을 볼 자신이 없었다.
“제가 끔찍하다고 말씀하세요. 지금 싫다고 말하셔야 해요. 괴물 같다고, 징그럽다고…….”
“…….”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후회하실 거예요.”
그 말에 페르딘이 고개를 저었다.
“전, 당신이 좋습니다.”
“…….”
“저 말고도 많은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공녀는 당장이라도 에린 경을 빼내 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고, 아몬 역시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
“마탑에 간 바한과 릴리아도 경을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카론 경도 마찬가지고요.”
그 말을 들은 에린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런 에린을 바라보던 페르딘이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벗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 목걸이를 건넸다. 에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목걸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페르딘이 항상 하고 다니던 목걸이였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가 목걸이를 움켜쥐던 기억이 났다.
“이상한 목걸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 어머니께서 주신 겁니다.”
“어머니요?”
“네. 혹시 신성 왕국을 아십니까, 에린 경?”
“서부의 계신 분들이 속해 있던 왕국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곳의 성녀님이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담담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전생에는 듣지 못한 페르딘의 과거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희 아버지인 황제 폐하께서는 저를 항상 반쪽짜리라고 부르셨지요.”
신성 왕국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성녀를 후궁으로 삼은 황제는 왕국의 피가 섞인 페르딘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페르딘을 더러운 피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만약 아실리 공작이 페르딘의 어머니를 돕지 않았다면, 그는 황자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목걸이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주신 겁니다.”
에린은 자신의 손에 놓인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신성 왕국의 보물이라며 언젠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지요.”
“어머니…… 께서요.”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설핏 웃었다.
“원래는 아름다운 푸른 보석이 있었는데, 에린 경께서 검술 학부에 오시기 며칠 전에 녹색으로 색이 바뀌더군요.”
“…….”
“이상한 일이죠?”
에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검술 학부에 그녀가 오기 며칠 전이라면,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왔을 때였으니까.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로웠다.
“어머님의 말씀으론 그 목걸이는 일생에 단 한 번,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이런 소중한 걸 제가 받을 순 없어요.”
“에린 경께서 가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쩐지 어머니께서도 그걸 원하실 거 같단 기분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