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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80화 (80/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80화

필립은 그녀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음에도 호승심을 가득 담아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에린, 나도 곧 상급반에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의 말에 에린은 좋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필립의 말은 금방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이 평화는 잠시뿐일 테니.

에린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건 먼 훗날의 일이 될 거였다.

아니, 어쩌면 졸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휴학계를 내야 해.’

그녀가 아텐츠 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온 건 페르딘와 카론과의 약속을 지키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도착하자마자 휴학을 하고 바로 리서스 후작성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초급반이자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날이 될 거다.

에린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드워드에게 찾아가 휴학하겠다는 뜻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초급반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에린을 맞이했다.

“에린! 서부에서의 승급전을 합격했다고 들었어.”

“정말 대단하군. 이제 앞날이 탄탄대로야. 리서스 후작님께서도 널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언젠가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대련해 주는 거 잊지 마라.”

다른 이들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에린은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몇몇 적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학생들이 있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필립이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거대한 덩치로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에린을 가리며 말했다.

“에린, 신경 쓰지 마.”

에린이 의아한 눈으로 연무장을 돌아보았다.

‘적대감이 가득하다.’

그녀가 검술 학부에 적응하고 나서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녀에 대한 검술 학부생들의 적대감은 이제 거의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초급반 학생들만 있는 지금 상황에선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그녀의 말에 필립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연무장을 가로지르며 중무장한 기사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디트리온이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있는 이들은 에린도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레옹 백작과 제2 기사단.

초급반의 학생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드 마스터인 백작이 이끄는 제2 기사단이 움직이다니. 전쟁이 발발한 게 아닌 이상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에린의 앞이었다.

그녀의 앞에 선 디트리온의 두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에린을 응시했다.

“또 보네, 에린.”

에린을 레옹 백작과 그의 기사단이 포위하듯 둘러쌌다.

필립과 초급반의 기사들이 그런 그들을 막으려고 나섰지만,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디트리온 전하,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필립은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

디트리온은 그를 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지금쯤이면 소식을 들었을 텐데?”

“…….”

“이것들을 다 끌어내.”

디트리온의 명령에 에린을 지키려 한 필립과 초급반의 기사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기사들에게 끌려갔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인가?”

“뭐가?”

“에린 리서스가 금지된 방법에 손을 댔다는 소문 말이야.”

“그것 때문에 리서스 후작님이 도주했다고도 하던데…….”

그들의 말을 듣자마자 에린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예상보다 코렐리아와 황제가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나도 일이 이렇게 되어 참 안타깝지만, 에린. 함께 가 줘야겠어.”

그 말이 끝이었다.

기사들이 에린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에린은 그대로 아카데미에 있는 감옥에 감금되었다.

아텐츠 아카데미는 중립 구역인 만큼 그 안에서의 싸움이나 다툼을 엄격하게 처벌했다. 그런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리기 전까지 가둬 놓는 곳이 바로 이 감옥이었다.

아카데미의 감옥은 마나 제어석으로 만든 창살 때문에 상급 기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어졌다.

디트리온은 에린을 그곳에 가둔 뒤, 무언가 고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린 리서스, 할 말이 없나?”

“…….”

“리서스 후작은 너와 카론 리서스를 버리고 도주했다. 여기서 너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에린은 그의 말에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디트리온은 에린을 자극할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카론 리서스, 그 꼬맹이 역시 연루되어 있어. 그렇지?”

에린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카론을 어쩌시려고요?”

“이미 연행한 상태야. 네가 어떻게 구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아버지는 정말 도주하신 건가요?”

에린의 말에 디트리온이 손을 휘저었다. 그의 손짓에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전부 나가는 걸 확인한 디트리온은 의자를 가져와 에린의 앞에 앉았다.

그는 창살 안에 갇힌 에린을 보며 이상한 정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울리네.”

그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지는 걸 느꼈다. 얌전히 제 앞에 앉아 있는 에린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진작에 이럴 걸 그랬어.”

디트리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몇 달간 나빴던 기분이 한순간에 좋아졌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원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에린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는 것. 그게 디트리온이 원하던 일이었다.

“자, 이제는 어때?”

“…….”

“이번에야말로 부탁할 생각이 들어?”

“부탁이요?”

“그래, 내게 부탁해, 에린. 네 아버지와 동생을 살려 달라고 말이야. 네 예상대로 리서스 후작은 도주하지 못했어. 코렐리아가 데리고 있지.”

에린은 감옥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디트리온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 웃기지도 않는 누명을 벗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가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흑마법으로 아무리 강해져 봤자, 소드 마스터의 경지는 이룩하지 못한다.

“페르딘은 너를 버릴 거다. 어차피 별로 득이 될 게 없는 약혼이었지. 그 녀석은 너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어. 넌 버림받을 거야, 에린 리서스.”

“…….”

“너도 알고 있잖아? 페르딘에게 네가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말이야. 그 녀석은 너에게 관심조차 없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 녀석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말란 뜻이야.”

디트리온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딘이 위험에 처한 에린을 버리고 파혼을 할 거란 확신. 그는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버리는 쪽으로 움직였으니까.

이번에도 별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후작성의 지하실에서 수상한 실험실이 발견됐다. 흑마법을 사용한 정황이 무척 확실하지.”

“…….”

“게다가 경이 아카데미에 오는 길에 무찌른 자들을 기억하고 있나? 그들은 흑마법으로 강화된 기사들이었어.”

“…….”

“신전도 움직이기 시작했어. 곧 있으면 신관들이 도착할 테지. 사실…… 네가 흑마법을 사용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에린.”

디트리온이 하는 말은 명확했다.

그녀가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만들겠단 뜻이었다.

실제로 과거에는 흑마법을 사용했다 누명을 쓰고 죽은 기사들이 많았다.

흑마법을 쓰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방법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디트리온의 말대로 신전의 공증까지 거친다면,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저에게 이러시는 이유가 뭐죠?”

디트리온의 말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에린이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더니 그에게 물었다.

“이유?”

“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글쎄, 네가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인가?”

디트리온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에린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소드 마스터를 싫어하고, 그는 그 뜻에 따랐을 뿐이었다.

“제 재능…… 때문이라고요?”

“…….”

“코렐리아에게 절 괴롭히라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요?”

“알고 있었어? 맞아, 코렐리아는 우리의 명령을 따라 움직였지.”

디트리온은 약간이지만 놀란 것 같았다.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아 봤자, 이젠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니.’

그는 에린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도 두려움에 빠져 있어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하긴, 아무리 에린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 마저 태연할 수는 없으리라.

그의 말이 끝나자 에린은 다시 벽에 머리를 기댔다. 디트리온은 그게 포기한 자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시시하네.’

그렇게 생각한 디트리온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나가려 했다.

에린이 그 순간,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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