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78화
‘정말 귀엽지만…….’
손을 떼는 순간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거 같아서 불안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불편하신가요, 에린 경?”
페르딘의 말에 에린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절대 아니에요, 페르딘 경.”
“…….”
“그게 아니라, 조금 당황스러워서…… 혹시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꼭 이러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페르딘의 얼굴이 흐려졌다.
에린이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에린 경. 전 과거의 기억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에린이 고개를 들어 다시 페르딘을 바라봤다.
그때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왜?
“대체 언제부터 그런 감정을 느끼신 건지 잘 몰라서…….”
“에린 경이 저와 약혼을 하자고 하기 전에…… 아카데미에서 에린 경을 봤습니다.”
“…….”
“고양이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당신이 나쁜 사람일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먼 과거였다. 그녀가 페르딘을 사랑하기도 전의 과거.
“그때부터 경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고 서서히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저를…….”
그의 말을 듣자 에린은 페르딘이 왜 그토록 자신에게 상냥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왜 지난 생에, 그녀를 위해 희생했는지.
그래서 더 참을 수 없었다.
“전 에린 경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경을 더 알아 가고 싶어요.”
페르딘의 말에 에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에린 경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란 걸 압니다. 제가 에린 경을 돕도록 해 주세요.”
페르딘은 에린이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기다림은 생각만큼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에린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공녀와 카론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딘?”
공녀가 묘한 얼굴로 페르딘과 에린을 살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누님? 페르딘 경과 함께 있었어? 우린 누님이 갑자기 사라져서…….”
“카론 경! 당장 돌아가죠!”
그의 옆에 있던 공녀가 카론을 막무가내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카론은 의아한 기색으로 공녀를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에린이 술에 취해 잘못된 것 아니냐고 걱정하던 말과는 다른 행동이 이상했다.
“돌아가다뇨? 공녀님께서 먼저 누님을 빨리 찾아와야 한다고 했잖아요.”
“…….”
“날도 추운데 밖에 있으면 안 된다고…….”
“…….”
“어서 나가서 누님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공녀가 할 말을 잃은 듯 두 눈을 굴렸다. 카론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공녀는 카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 에린이 밖에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냐면서. 지금 바로 에린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외쳐서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두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날이 추워서 그런가, 볼이 빨갛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카론의 말에 공녀가 그를 꼬집었다.
그러나 카론은 여전히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팔뚝에서 느껴지는 따가움에 인상을 썼다.
그러다가 어딘가 수상하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페르딘을 바라보았다.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기분이 나빴다.
“카론 경…… 당신이 눈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공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에린이 카론의 말을 듣고 몸을 움직인 것이다.
“페르딘 경, 저희도 들어가죠.”
페르딘의 시선이 카론을 향했다. 곱지 않은 그의 시선에 카론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대로 떠나려던 에린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페르딘에게 말을 건넸다.
“조금만 고민하고…… 며칠 뒤에 말씀드릴게요.”
페르딘은 에린의 말에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에린에게 확답을 받겠다는 듯 물었다.
“며칠 뒤에 말이지요.”
“네, 그때…… 전부 말씀드릴게요.”
페르딘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그제야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그려졌다.
* * *
그들은 다 함께 작은 연회장에 돌아왔다. 이미 몇 명이 소파나 테이블에 잠들어 있었다.
에린은 페르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파티 내내 에린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을 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으셨잖습니까. 굳이 저들과 어울려 주실 필요 없습니다.”
스무 살 성년이 되지 못한 카론을 제외하고는 다들 열심히 마시고 있었다.
그중 공녀가 제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까르르 웃으며 아몬을 바라보는 모습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아몬은 술이 담긴 컵을 내려놓고 패배 선언을 했다. 그리고 기가 질린 얼굴로 공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공녀와 어울리려 하다가, 제1 기사단의 기사들도 많이 당했었죠.”
“공녀님이요?”
“그녀는 엄청난 주당입니다. 신성력이 풍부해서인지 술을 좀 마신다는 웬만한 기사들보다 술을 더 잘 마시죠.”
페르딘의 말대로 공녀는 엄청난 주당이었다.
그녀와 내기를 끝낸 아몬이 비틀거리다 곧 잠이 들었다. 공녀가 그런 아몬을 보며 허약하다고 혀를 차는 모습이 보였다.
데렉이 허망한 듯 중얼거렸다.
“성녀님이 저런 분이었다니…….”
에린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페르딘이 자신을 챙겨 주는 것도, 그의 기사단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술이 완전히 깨 버렸어.’
아까 테라스에서 페르딘과 둘이 대화를 할 때 이미 잠은 전부 깨 버린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다시 입을 맞춰 왔을 때부터였다.
에린의 볼이 옅게 달아올랐다. 술이 깼는데도 왜 열이 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파.’
그렇다는 건, 꿈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정말 그와 함께해도 되는 걸까?
진짜로?
에린의 시선을 느낀 페르딘이 뒤로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에린은 한때, 페르딘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페르딘은 그의 감정이 과거의 기억과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그가 본 과거의 에린 리서스와 지금의 자신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의 실체를 알고도, 그는 자신과 함께하겠다고 말해 줄까?
기대하면 실망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에린은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싹트고 있는 희망을 느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페르딘의 말대로 그와 함께해도 좋을 거다.
그만 괜찮다면 에린은 어디로 가든 행복할 테니까.
에린은 페르딘의 웃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예비 기사단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에린도 어느새 그들을 따라 웃고 있었다.
어느 날의 행복한 한때였다.
* * *
에린이 승급전을 성공했다는 소식은 널리 퍼졌다.
제국에서 그녀가 승급전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쯤 코렐리아는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황실의 주요 인원들이 모여 있는 파티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에린 리서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코렐리아 님, 소식 들었어요. 에린 경이 서부의 승급전을 통과했다면서요!”
코렐리아의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원래의 코렐리아라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연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도 소식을 들었답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코렐리아의 대답에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귀를 세우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아실리 공작도 그 연회장에 있었다. 에린에 관한 말이 나오자 그도 저절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훌륭하군.’
아실리 공작은 에린이 서부의 승급전을 성공해 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생각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또 다른 놀라움을 주었다.
‘역시 제자로 삼아야 해.’
승급전으로 인해 미뤄졌지만, 그는 황제가 벌이는 이 쓸데없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에린을 제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의 시선이 힐끔 코렐리아에게 향했다.
아실리 공작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코렐리아에게서 어딘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코렐리아 님, 에린 경이 검술 학부로 간 건 페르딘 전하 때문이 아니었던 건가요?”
“맞아요. 후작가에서 어렸을 적부터 검술을 연마했던 거죠?”
아실리 공작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코웃음을 쳤다.
에린에 대해 틈만 나면 헐뜯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주제에 지금은 누구보다 에린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수석 기사도 그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정말 가증스러운 자들이군요.”
누군가를 험담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실리 공작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