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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76화 (76/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76화

만약 에린 리서스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돈다면 그녀의 평판은 다신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바닥을 치게 될 것이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에린 리서스를 찾아간 기사단이 전멸했다. 그렇게 소문을 내도록 해.”

기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흑마법을 이용해 만든 마나석으로 강해진 자들은, 폭주하기 전까지는 정체를 알아내기 어려우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 * *

아텐츠 아카데미의 연무장.

“에린 리서스가 돌아왔대!”

한 예비 기사의 말에 연무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소문이 맞았어.”

“승급전에 통과한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부의 승급전. 재능 있는 기사들이 꿈꾸고 한 번쯤 도전하는 임무였다. 하지만 그것에 도전한 기사 대부분이 목숨을 잃곤 했다.

이제는 치기 어린 도전이라 치부되어, 도전하는 자도 많지 않았다.

그 아실리 공작마저도 정식 기사 승급전에서 도전한 것이었으니, 그녀의 승급전 결과는 신기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순순히 감탄하는 자도 있었고, 눈에 질투심이 어리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도 들리더군.”

“이상한 소문?”

“에린 리서스가 황제 폐하의 명을 전하러 온 상급 기사들을 죽였다는 소문 말이야.”

“게다가 흑마법을 사용해 강해졌다는 말도 있대.”

그를 마지막으로 예비 기사 중 더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부의 승급전을 성공해 낸 것도 놀라운 일인데, 상급 기사를 죽였다고?

“그게 사실이야?”

“그래, 아카데미 근처의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들었어.”

“기사가 한 명이었나?”

“최소 다섯 명이었어.”

“그건 불가능해. 소드 마스터도 아닌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몇몇 검술 학부 학생들이 언성을 높였다.

“그럼 그 소문이 진짜인 거 아닐까? 흑마법을 써서 강해졌다는…….”

그러나 한 학생의 말에 연무장에 또 침묵이 감돌았다.

“개소리하지 마.”

그 말을 꺼낸 건 카론이었다.

연무장의 한구석에서 예비 기사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질투에 눈이 멀었나? 기사로서 부끄럽지도 않아? 남을 모함할 시간에 수련이나 열심히 하지그래?”

“하지만 카론 리서스! 너도 저번에 그랬잖아. 에린 리서스는 검을 잡은 적이 없다고.”

“…….”

“검에는 흥미도 없다고 말했었어. 분명 그랬었다고. 이 제국의 사람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카론의 말에 기사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강해진다고? 아무리 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한들 그게 가능한 일이야?”

카론이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그의 앞에 있던 기사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카론은 사나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지금 네 말은, 리서스 후작가 전체를 모욕하는 것과 같아. 그 말을 책임질 수 있나?”

가시 돋친 말에 더 말을 꺼내는 예비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 싹이 튼 의혹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거였다.

카론은 검을 챙긴 채,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기분이 더러운 소문이었지만, 덕분에 에린이 무사히 아카데미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카론은 아카데미의 중앙 홀로 향했다. 그는 에린이 그곳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린이 공녀와 아몬에게 붙들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공녀는 에린의 허리춤에 매달려 거의 오열을 하는 중이었다.

“에린 경, 저한테 인사도 없이 서부로 승급전을 떠나시다니요.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슬펐는지 아세요?”

공녀를 보는 카론의 두 눈은 아무 감정 없이 건조했다.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은 이제 공녀의 실제 모습을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다.

에린이 떠난 이후로 그녀가 예비 기사단원들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명령이 내려와서, 죄송해요.”

에린의 말에 공녀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아니요, 에린 경을 탓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다음에는 제게도 귀띔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베베 꼬는 공녀의 모습에 아몬이 고개를 저었다.

데렉은 아직도 그런 공녀의 모습에 적응되지 않았는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카론은 팔짱을 깬 채 에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비 기사단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녀가 마음껏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게다가 그와의 약속대로 에린은 무사히 돌아왔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건가?’

하지만 이내 카론의 미간이 좁혀졌다. 겉으로 보이는 손등이나 힐끔 본 소매 안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에린이 서부에서 다친 것이다.

“누님.”

“카론!”

에린이 카론을 보며 활짝 웃었다.

어릴 적 그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지었던 웃음이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강해졌구나.”

“…….”

“그래도 너무 몸을 혹사하지는 마.”

에린의 말에 카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깨달음을 얻어 그녀를 보기 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에린이 떠난 뒤에도 무리하면서 몸을 단련해 왔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그 사실을 한눈에 파악한 것이다.

카론은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아무리 단련했어도 에린에게 도움이 되려면 멀었다는 사실이 단숨에 와닿았다.

“내가 누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많이 다친 건 아니지?”

그렇게 말한 카론의 시선은 에린의 상처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부에서 다 치료하고 온 길이야. 마물이랑 싸우느라 어쩔 수 없었어.”

그냥 마물도 아니고 마물 떼였지만. 에린은 그 사실을 카론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별로 크게 다친 건 아니야.”

그 말을 듣고도 카론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에린의 옆에 있는 공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에린의 상처가 신성력으로 나을 거였다면 공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신성력은 이미 사용한 상태구나.’

아실리 공녀는 에린의 옆에서 그녀의 손을 만지고만 있었다.

아마 신성력으로 고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어서이리라. 카론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누님의 실력으로 마물에게 저리 당했을 리 없어. 승급전만 치른 게 아닐 거야. 분명 서부에서 무언가를 하고 왔어.’

그는 에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카론은 당장이라도 서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온 건지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막 서부에서 돌아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누님을 더 피곤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에린에게 말을 하는 대신 헬릭스를 마음에 안 든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마치 그녀의 호위 기사라도 되는 듯 붙어 있는 게 거슬렸다.

‘승급전을 가기 전에는 그렇게 싫어하더니.’

서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 싹수없는 놈이 변한 건지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때였다. 아실리 공녀가 기쁜 듯 손뼉을 쳤다.

“오늘 파티를 열어요.”

“파티요?”

“네, 에린 경의 승급전 임무를 완수해 낸 걸 축하해야죠.”

공녀가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린은 파티를 싫어했다. 그녀에게 있어 파티란 괴로운 시간이었으니까.

이번 토벌전 승전 연회를 제외하곤 코렐리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듯 황실 파티에 참여한 것밖에 없었다.

에린이 기억을 더듬으며 가만히 있자 아실리 공녀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회의실 안쪽 보관함으로 에린을 이끌었다.

“제가 페르딘의 집무실에서 가져왔어요.”

공녀에게 숨겨진 비밀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는 사실 엄청난 애주가였다.

일반 사람들이 ‘성녀라면 당연히 이래야지!’라고 생각하는 모습과 완전히 반대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가끔 페르딘이 선물을 받아 집무실에 놓아둔 와인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는데 범인은 전부 공녀였다.

그런 공녀를 보며 헬릭스가 말했다.

“아카데미에선 금주입니다, 성녀님.”

“오늘은 예외예요.”

“예외는 없습니다만…….”

헬릭스의 말에도 공녀는 못 들은 척하며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 *

“페르딘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조금 늦는다고 하네. 우리끼리 먼저 마시고 있으래.”

에린은 와인 잔을 들고 조금씩 술을 홀짝였다. 전생에선 술을 자주 즐기고는 했다.

세 번째 삶에서 마물과의 전쟁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기사들 대부분은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셨다. 에린도 마찬가지였다.

에린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이 몸으로는 술을 마신 적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두 너무 자연스럽게 마시고 있어서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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