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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74화 (74/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74화

지금도 헬릭스는 아주 쓸모가 많았다. 야영에 필요한 모든 귀찮은 일들을 그가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에린이 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녀가 그럴 때마다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헬릭스 경, 제가 도와드릴게요.”

“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헬릭스의 정중함이 에린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서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그의 시선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헬릭스는 그녀를 페르딘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왜?

에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의 태도를 불편해하는 걸 알았는지 헬릭스가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뒤에는 거슬리게 굴지 않겠습니다. 가는 길이라도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헬릭스의 두 눈이 간절해 보였다.

에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부터는 나름대로 편안한 길이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아마 많은 것이 변할 거다.

‘할 일이 많아. 코렐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확실하게 밝혀내야 하고, 아버지도 구해야 하고…….’

조금만 더 가면 아카데미에 도착할 것이다. 헬릭스와의 이 기묘한 동행 역시도 끝이 나겠지.

두 사람은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직전, 한 마을에 도달했다.

“이제 이 마을만 지나면 아텐츠 아카데미에 도착하겠군요.”

그 말을 하는 헬릭스의 얼굴이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그들이 묵기로 한 숙소는 마을의 조그마한 여관이었다. 1층에 식당을 운영해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여관은 활기가 넘쳐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밝았다. 마치 세상에 어두운 면이 없다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에린과 헬릭스는 각자 수프를 시켰다.

“엄마! 이거 사 주세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에린이 고개를 돌렸다.

한 가족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이가 투정을 부리며 자신의 엄마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아빠로 보이는 사람은 그런 그들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자, 여자는 웃으며 아이를 껴안았다. 이어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해.”

에린은 그 가족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들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어린 시절 그녀가 후작성의 첨탑에서 종종 상상하던 모습이었다.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게 저런 거겠지.

아이와 에린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까르르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린 역시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점원이 음식을 내왔다. 테이블에 수프와 빵이 놓였다.

“에린 경, 음식이 식겠습니다.”

헬릭스는 멍하니 있는 에린의 앞에 수프가 담긴 그릇을 놓아 주며 말했다.

그녀는 그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헬릭스가 먼저 수프를 떠먹었다.

“생각보단 맛이…….”

괜찮네요, 라고 그는 말하려 했다.

그때였다. 헬릭스가 에린의 앞에 놓인 수프 그릇을 쳐 냈다. 그리고 거센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에린이 헬릭스의 목덜미를 잡아서 자신의 뒤쪽으로 잡아당겼다.

헬릭스가 있던 자리에 짧은 검이 박혔다. 에린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차앙!

맑은 소리가 나며 날아오던 암기가 튕겨져 나갔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평화롭던 식당 안에 비명이 울려 퍼졌고 괴한들이 식당에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에린의 뒤에서 헬릭스가 중얼거렸다.

“몸을 마비시키는 독입니다, 에린 경.”

헬릭스가 날아오는 암기를 피해 옆으로 몸을 굴렸다.

에린 역시 놈들의 검을 피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죽어라!”

최소 다섯 명. 에린이 괴한들을 유심히 살폈다. 자객치고 은밀하지도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함정이군.’

에린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힘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서부의 승급전을 성공해 냈으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저 검의 선택을 받은 천재의 이름을 알리는 사건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대낮의 공격. 강한 괴한들. 이제 막 서부의 승급전을 성공해 낸 예비 기사로서는 상대하기 힘들 적이었다.

만약 순전히 에린을 죽이는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공격하지 않았으리라.

적은 그녀가 실력을 드러내길 원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췄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그만둬!”

비명이 들렸다. 에린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곳에 아까 그녀가 바라보았던 가족들이 보였다.

“엄마! 엄마를 놔줘!”

식당에 들어온 이들은 에린만을 노리지 않았다. 분명 그들의 목적은 그녀인 게 확실한데도 그들은 일반인을 인질로 삼았다.

마치 에린이 그들을 지킬 거란 걸 아는 듯한 행동이었다.

“거기 검을 든 여자.”

습격자 중 한 명이 에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장 검을 놓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인간들을 한 명씩 죽이겠다.”

“죽인다고?”

“그래, 그러니 검을 놓고 항복해.”

“놓지 않는다면?”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전부 죽겠지. 내 동료들이 지금 잡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나 보지?”

괴한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을 곁눈질했다.

엄마를 위해 용기 냈던 아이가 다른 습격자에게 잡혀 있는 상태였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그녀처럼.

에린은 어린아이를 울리는 인간들이 정말로, 정말로 싫었다.

그녀는 아이와 눈을 마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여유였다.

그녀가 아이를 향해 말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렴. 십 초를 세면 끝나 있을 거야. 무서운 괴물들은 전부 사라질 거란다.”

그건 어린 시절 그녀가 무서운 순간을 이겨 내던 마법 같은 말이었다.

에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왠지 그 말에 따라야 할 것만 같은 힘이.

헬릭스가 인상을 쓴 채, 에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에린 경, 함정입니다.”

“알아요.”

“설마 힘을 드러내실 겁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요.”

두 사람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을 습격한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에린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서부의 승급전을 끝내고 돌아온 괴물 같은 예비 기사란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 강해진 기사였다.

눈앞에 있는 에린도 앞에 있는 자들이 그녀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기세에서부터 강함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에 반해 에린은 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위명과는 다르게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여유라니?

남자는 자신이 받은 명령을 떠올렸다. 그 중엔 에린 리서스에게 전하라고 내려온 말도 있었다.

“우리가 당신에게만 왔다고 생각하나?”

“뭐?”

“페르딘 렉시아.”

“…….”

“그자가 지금 어떤 상태일 거 같아?”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린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녀의 뒤에 있던 헬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좀 보기 좋은 얼굴이 됐다고 생각한 남자가 씨익 웃었다.

“검을 놓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옆에 있는 꼬맹이 먼저 죽인다.’

생각과 함께 곧바로 검을 찔러 넣으려 했으나 그의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어느새 그의 앞에 에린이 나타났다. 그녀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난 사람을 죽일 때는,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 말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 * *

에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건 헬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까지 어떤 정신으로 온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에린은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에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페르딘의 일이라면 말이 달랐다.

‘나에게 온 수준의 습격자들이라면, 페르딘도 위험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가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에린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곁에 계속 붙어 있어야 했나? 하지만 서부엔 가야만 했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그런 에린을 보다 못한 헬릭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진정하십시오, 에린 경.”

“페르딘 경이…….”

“전하께선 강한 분이십니다.”

에린은 그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헬릭스의 말을 듣고 보니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황자인 페르딘이 다쳤다면 아카데미가 이렇게 조용할 리 없었다.

그녀와 헬릭스는 아카데미의 중앙 홀로 향했다. 페르딘이 아니더라도, 그곳에 가면 그의 예비 기사단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간 중앙 홀엔 데렉과 아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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