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73화
“전 이제 괜찮으니…….”
에린은 당황했다. 이시스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에린 경. 저희는 경을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
“저희 때문에 일어나시지 못하는 줄 알고…….”
“이시스 님?”
“이시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네?”
“혹시 부담스러우실까요?”
그렇게 말하는 이시스의 표정이 자책하듯 어두워졌다.
에린은 정말로 당황했다. 그가 자신을 왜 이렇게 정중히 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그녀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여기는 걸까?
“역시, 제가 문제겠지요. 저 같은 건 차라리…….”
“아니, 아니에요. 이시스, 이시스라고 부를게요.”
에린의 말이 떨어지자 이시스가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저런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나? 에린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린 경.”
그렇게 말하는 이시스는 정말로 기뻐 보였다.
에린은 어쩐지 당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헬릭스 역시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고, 이시스와 똑같이 행동했다.
한참을 죄송하다, 감사하다,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심경을 변화시킨 일이 무엇인지 에린은 알 수 없었다.
“에린 경, 제가 이 약을 챙겨도 될까요?”
에린이 가지고 온 병에 담긴 약은 이시스가 챙겼다. 일기장은 헬릭스가 따로 챙겨 페르딘에게 보고할 거라 들었다.
그녀는 원래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서부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에린을 이시스가 만류했다.
서부의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녀를 이시스와 헬릭스를 살려 준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시스는 양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에린에게 말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최소 일주일은 쉬셔야 합니다.”
“…….”
“몸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
“아직은 회복에 좀 더 집중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에린은 이시스가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다지 알고 싶은 사실은 아니었으나 누군가가 걱정하는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이시스만이 아니었다. 헬릭스는 말없이 에린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화장실이나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그녀의 옆에 붙어 있으려고 했다.
마치 주인을 따라다니는 강아지 같은 느낌이었다.
“헬릭스 경, 춥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전 이게 좋습니다.”
대체 뭐가 좋다는 걸까?
에린은 자신의 방문 앞에서 보초를 서는 헬릭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에린이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에린은 자신이 위험해질 상황이라면 헬릭스 역시 위험하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비록 불필요한 일이었으나, 자신에 대한 마음이 느껴져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에린은 본격적으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몸이 다 낫고 그녀가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헬릭스와 이시스의 도움을 받아 신전 한쪽에 작은 묘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기사들을 위한 묘지였다.
* * *
늦은 밤, 에린은 짐을 챙겼다.
‘떠나야지.’
서부에 정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서 머물 수도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구해야 하는 사람은 더 많았다.
그렇기에 휴식은 언제나 짧아야만 했다. 평온함에 물들면 거기에 안주하고 싶을 테니까.
그녀의 적은 에린만 괴롭게 하지 않았다.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어.’
그녀의 지옥에는 더 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쯤 그녀의 아버지는 어디엔가 감금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헬릭스와 페르딘의 죽음에 대한 단서를 자연스럽게 찾기 위해 승급전에 응한 거였지만 그들의 계획을 안 이상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
‘그래도 샬롯과 레이먼이 죽었으니 코렐리아가 뭔가를 바로 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에린은 바로 떠나지 못했다. 헬릭스와 이시스가 신전의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떠날 거란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이시스가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승급전 임무도 진작에 완수하셨으니 곧 떠나시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조금 더 쉬셨으면 했습니다.”
“…….”
“하지만 제 욕심이겠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이시스의 얼굴은 착잡해 보였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이시스는 전대 성녀의 예언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들었던 미래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기 위해 신께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에린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성녀님은 종종 에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고는 했다. 그녀가 얼마나 상냥한지, 얼마나 착하고, 마음이 아름다운지.
마치 자랑을 하지 않고는 못 참는 사람처럼 말하고는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는지 알면서도…….
이시스는 그때 성녀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알겠으니 제발 멈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시스가 본 에린은 찬란한 사람이었다. 성녀님이 왜 그녀에 대해 말하는 걸 멈출 수 없는지, 이시스는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 역시 에린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으니까.
“감사합니다, 에린 경. 당신이 없었다면, 서부는 큰 위험에 처했겠죠.”
“…….”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 말에 에린은 허리춤에 있는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받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서부에서 벌어진 일은 아직 외부에 밝히기 힘들 겁니다.”
“…….”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는지, 그리고 에린 경이 무슨 일을 했는지…….”
달빛이 밝은 날이었다.
“하지만 저희가 기억하겠습니다. 언젠가, 언젠가 모든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
“그곳에 기사들이 있었노라고.”
하지만 이시스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긍지를 잃지 않은, 누구보다 기사다운 자들이 있었노라고 말입니다.”
이시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린 경, 헬릭스를 데려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헬릭스 경을요?”
이시스의 옆에 있던 헬릭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한 행동이었다.
“그가 언젠가 에린 경께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 * *
요 몇 주, 페르딘은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서부는 소식이 느린 땅이었다. 가끔 그곳을 오가는 상단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연락할 수단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데렉이 흥분한 얼굴로 소식을 가져왔다.
“에린이 서부의 승급전을 통과했대!”
서부의 신전에서 출발한 전령이 전해 준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페르딘은 안심할 수 없었다.
‘승급전을 하면서 다치진 않았겠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잠시라도 손에서 일을 놓으면, 에린이 떠올랐다. 그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최악의 경우가 떠올랐다.
“꼭 돌아올게요.”
에린이 남긴 그 약속만이 페르딘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를 믿자.’
그의 시선이 힐끔, 손에 들린 편지로 향했다.
그는 에린이 떠나고 나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릴리아가 후작 부인의 하녀에게 받기로 했던 검은색 마나석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릴리아에게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릴리아는 마탑주가 내 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고행길을 마무리하여 마탑의 인정을 받았다.
마탑의 지원을 받는 릴리아의 조사는 매우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편지를 읽는 페르딘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네가 지원해 준 기사 몇이랑 얼마 전에 후작성 근처를 조사해 봤어. 확실히 무언가가 이상해.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야 할 것 같아. 조만간 아카데미를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네.]
* * *
에린은 헬릭스와 단둘이 있는 이 상황이 낯설고 어색했다.
헬릭스는 과묵한 편이었다. 그리고 귀공자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약간 상식이 부족한 편이라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따금 그녀를 보며 귀를 붉히거나 심장의 박동 소리가 빨라졌는데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다른 기사들처럼 동경인 걸까? 생각해 보았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이라면 몰라도, 헬릭스는 누군가를 동경할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기사로서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게 설득력이 있었다.
‘헬릭스가 쓸모 있을 거라는 이시스의 말은…… 어떤 의도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