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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68화 (68/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68화

* * *

“제가 마물들을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에린의 말을 들은 이시스가 얼굴을 굳혔다. 그녀의 말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헬릭스를 힐난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헬릭스는 어딘가 억울한 얼굴로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저들을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요.”

“안 됩니다.”

“알아요, 무모한 선택인 거. 하지만 이대로 저 마물 떼를 두고 나가게 된다면요?”

“…….”

“저들이 서부의 사람들이라고 했죠.”

“그럴 겁니다. 서부에서 사라진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만약 마물화된 그들이…… 다른 이에게 조종당해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면요. 죽어서도 괴로워할 거예요.”

기사로서 끝을 맞이하고 싶다는 소원. 에린은 그걸 꼭 이뤄 주고 싶었다.

이시스는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그가 감당하고 있는 목숨들을 지탱하려면 무조건 무엇이 더 이익인지 계산하고 따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장 도주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미 기력이 많이 쇠했다. 비단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에린이 하겠다는 일은 이성적으로 봤을 때 한없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 에린이 이곳에서 그들을 버리고 도주한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굳이 이렇게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시스, 당신은 저를 모릅니다.”

이시스가 대답하지 않자 에린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이시스는 그녀를 몰랐다. 아니, 이 세상에 그녀를 온전히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는 당신의 생각보다 더 강합니다. 이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에린과 두 눈을 마주치는 순간, 차마 안 된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 * *

에린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옆에서 헬릭스가 그녀를 보조하고 있었다.

마물들은 좀 전에 느꼈던 것처럼, 기사같이 정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한때 기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검술을 연마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들은 기사였다.

촤앙!

그들의 삶은 결코 이런 식으로 끝나선 안 됐다. 미래에, 황제는 그들의 죽음을 기만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했으며 동시에 서부에 있는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연인,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사람들이다.

그들을 이용해 서부 사람을 죽이는 짓을 에린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죽어서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만당하지 않고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에린은 움직였다. 마나를 있는 힘껏 방출하자 그녀의 기세가 달라졌다.

마나는 검을 타고 올라가 소드 마스터만이 만들 수 있다는 오러를 형성했다.

누구보다 찬란한 하얀빛을 뿜은 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죽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내가 죽는다면 그곳은 전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팔에 자그마한 상처가 생겼다. 다리도, 얼굴에도, 목에도. 에린은 순식간에 상처투성이가 됐다.

그 순간, 그녀의 팔에 긴 자상이 생겼다. 옆에 있던 헬릭스의 얼굴에도 피가 튈 정도로 큰 상처였다.

하지만 에린은 멈추지 않았다.

헬릭스는 검을 휘두르며, 그 모습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그는 먼 과거, 아실리 공작의 검을 본 적이 있었다. 공작이 수천의 마물 앞에서 휘두르는 검의 힘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압도적인 강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에린의 말이 맞았다. 그와 이시스는 에린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있었다.

마물의 행동엔 기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검을 쓰듯 움직였다.

일반적으로 기사들은 마물들을 상대할 때와 대련을 할 때 다른 식의 검술을 사용하고는 했다.

이기고 살아남는 게 중요한 살생의 검과 서로 예의를 갖춰서 하는 대련에서의 검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에린은 마치 대련하듯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헬릭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비효율적인 행동이야.”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는 헬릭스의 눈가는 불타오르듯 뜨거웠다. 그 역시 에린이 무엇을 하는지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기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헬릭스가 본 그 어떤 광경보다 숭고했다.

헬릭스는 앞에 있는 마물을 베어 내며 전대 성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그 아이가 상냥한 사람이라 그런 거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불현듯 헬릭스는 에린이 그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그가 평생을 모셔야 할 주인이라는 사실을.

* * *

“정말 웃기고 있군.”

샬롯은 에린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 연구실에서 직접 마물을 연구한 만큼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험체들에게 건네준 일기장 역시, 그녀가 준 것이었으니까.

샬롯은 그 일기장을 가끔 읽어 보면서 절망에 빠진 인간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도 연구했다.

그러니 딱히 그들을 생각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일기를 쓰며 서로 위안을 받는 모습을 보고 우습다고 생각했다.

‘죽는 건 그냥 죽는 거지,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 듯이…….’

죽음이 두려워서 헛소리를 내뱉는 것일 터였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죽는다면, 억울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 인간이 존재할 리 없었다.

입에 발린 말을 누가 못하나. 그녀는 그래서 기사, 기사 하는 것들이 싫었다.

지금 에린이 하는 행동도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일기장의 내용을 보고 기사로서 죽고 싶다는 그들의 소원을 재현하고 있다니.

마치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는 듯한 행동은 전혀 쓸데가 없는 짓이었다. 마물들은 이미 이지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야. 다 뒈진 놈들이라고…….”

꼴에 기사라고 그들을 동정하고 있는 걸까?

“끝까지 멍청한 인간.”

샬롯은 에린이 싫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알 수 없는 옅은 혐오를 느꼈다.

그 순수한 눈이, 코렐리아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절대 꺾이지 않았던 눈동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샬롯의 손이 빨라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유롭던 샬롯의 얼굴에 점점 긴장의 빛이 어렸다.

에린이 빠른 속도로 마물들을 해치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감히 에린 리서스가, 그녀가 만들어 낸 마물들을 이렇게 쉽게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린은 그야말로 괴물 같았다. 하지만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샬롯은 지금까지 여러 명의 소드 마스터들을 봐 왔다. 그 대단하신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격의 차이가 존재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보육원에 있는 마물 떼를 상대하는 일은 아실리 공작 정도여야 가능할 것이라고.

샬롯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손이 보였다.

“망할, 내 걸작을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죽여 버리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샬롯은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연구의 결과물을 품 안에 끌어모았다.

만약 이 일에 실패한다면, 코렐리아의 분노가 얼마나 클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난, 레이먼 같은 놈과는 달라. 그런 약해 빠진 놈과는…….”

그때였다.

샬롯의 눈에 이시스가 보였다. 철문 안에서 에린과 헬릭스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는 그가.

‘그래,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샬롯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에린은 그녀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본능적으로 마물을 조종한 이를 찾고 있을 것이다.

만약 진짜로 소드 마스터라면, 이미 예민한 감각으로 어렴풋이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차라리 에린이 마물을 전부 해치우기 전에 그녀가 먼저 움직이는 게 옳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저곳으로 그녀가 유인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비밀 통로로 가면 에린 리서스도 눈치채지 못하겠지.’

그녀의 방과 지하실은 비밀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에린 몰래 인질을 잡을, 마지막 기회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샬롯은 손에 들고 있던 마나석을 삼켰다.

* * *

헬릭스와 에린이 지하실의 밖에서 마물들을 상대하는 동안, 이시스는 다시 지하실의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밖에 있어 봤자 방해만 될 뿐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이시스는 기도를 마치고 연구의 증거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급히 도망쳐야만 했을 때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갈 수 있단 희망이 있다. 그러니 갖고 나갈 만한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대로 묻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이시스의 시야에 어떤 약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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