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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65화 (65/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65화

하지만 지금 당장 이곳에 서 있는 것도 무리인 그들이 안쪽까지 들어가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포기할 순 없었다.

아마 이대로 도망친다면, 그는 후회하리다.

‘어차피 지금 도망친다 한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긴 어려워.’

헬릭스는 가만히 마물 떼를 응시하는 에린을 돌아보고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리 그녀가 막무가내로 따라오고 싶다고 했어도 딱 잘라 거절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헬릭스는 성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없어도…… 너희는 살아남을 거란다.”

하지만 성녀님, 예언이 틀렸나 봐요. 헬릭스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그때였다. 에린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돌아봤다.

“맹세해 주세요.”

“에린 경?”

“이곳에서 본 일들을 죽는 그 순간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들이 맹세해야 도울 수 있습니다.”

돕는다니? 그녀가 도운다고 해서 무언가가 달라질까?

이곳에 있는 자가 상급 기사라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헬릭스는 에린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린이 그와 이시스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성직에 있는 자들이 신께 맹세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겁니까?”

“잘 알고 있으니 하라는 겁니다.”

“에린 경, 당신…….”

“시간이 얼마 없어요. 돌아가면 말해 줄 테니 어서 맹세하세요.”

헬릭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말을 꺼낸 에린의 팔에선 피가 멈추지 않았고,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에린의 두 눈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헬릭스가 에린에게 무어라 항변을 하려 할 때였다. 그를 막은 건 이시스였다.

그는 헬릭스의 팔을 붙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맹세하겠습니다.”

“이시스?”

“이곳에서 본 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신께 맹세합니다.”

에린의 시선이 헬릭스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잠시 고민하던 헬릭스 역시 대답했다.

“저 역시…… 맹세합니다.”

헬릭스는 제 성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신에게 하는 맹세는 결코 어길 수 없었다. 맹세를 어길 경우, 성력이 전부 사라져 버리니까.

그래서 신전의 사람들은 맹세를 금기시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약속이었다.

그들의 맹세가 끝나자마자 에린이 검을 쥔 채 뒤돌아섰다. 그녀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어렸다.

* * *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이시스의 볼 위로 피가 튀었다. 그의 옆에 있던 에린이 빠르게 앞쪽으로 몸을 날렸다.

수많은 마물이 그녀를 붙잡겠다고 손을 뻗는 게 보였다.

다수의 마물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실전 실력이 풍부한 기사들도 고전하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에린의 대처는 능숙했다. 마물들의 속도도 빨랐지만, 그것보다 그녀가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기이익!

에린이 휘두른 검이 마물의 목에 닿았을 때, 기이한 소리가 났다.

무언가에 걸린 듯 베어 내지 못하게 하는 반발력이 느껴졌다.

만약 마나로 팔을 강화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놈들에게 상처도 입히지 못했으리라.

이곳의 마물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헬릭스가 신성력을 사용하면서도 마물을 쉽게 베어 내지 못한 건 이유가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 광경을 보던 헬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에린은 빠르고, 강했으며, 무언가를 베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실전 경험이 없는 기사라고는 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마물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몸에 마치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마물들을 상대하는 모습은 아실리 공작을 연상시켰다.

사실 그 이상은 헬릭스의 눈으로 좇는 게 불가능했다. 그의 옆에 있던 이시스 역시 감탄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검을 알지 못하는 그가 보기에도 에린의 움직임은 평범한 기사들과 달랐으니까.

이시스는 에린을 바라보면서 헬릭스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마어마한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요.”

그의 말대로였다.

에린 리서스는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을 실력이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헬릭스가 이시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쩌면, 살아 돌아갈 수도 있겠어.”

그는 이시스에게 다가오는 마물들을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에린은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시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마물들이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우리를 어디론가 유인하는 것같이…….”

마물들은 조금씩이지만 일부러 틈을 보여 그들이 더 안쪽으로 갈 수 있게 했다.

마치 어느 장소로 가길 원한다는 듯이.

“하지만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에린 경을 믿을 수밖에 없어.”

마물들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에린이 최선을 다해 길을 터 주고 있었지만, 결국엔 마물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게 될 터였다.

“어서 빨리 돌아가서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할 텐데.”

이 정도의 마물 떼를 서부에선 감당할 수 없었다. 당장 돌아가서 제국에 지원군을 요청해야 한다.

지원군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끔찍한 피해가 벌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죽겠지.

하지만 이시스는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에린 리서스가 정말 황제의 편일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편이라면 그들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에린은 오히려 그들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고 있었다.

헬릭스가 이시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대로 빠져나가면 돼. 뒷일은 살아남고 나서 생각하자.”

“…….”

“네가 살아남아야, 서부를 지킬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헬릭스가 마물을 하나 베어 넘겼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만약 이곳에 그와 이시스만 존재했다면 살아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지금 에린이 있는 이상, 희망이 있었다.

* * *

서부의 보육원.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 샬롯이 도착한 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에린이 서부로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그녀 역시 서부로 출발했다.

‘헬릭스,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어떻게 이곳을 알고 조사하러 온 건지.’

샬롯은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보육원을 살폈다. 이곳은 그녀가 만든 걸작이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마물을 만들어 낸 장소.

‘몇 년만 더 있었으면 완벽해졌을 텐데 아쉬워라.’

원래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마물을 보육원 밖으로 못 나가게 막는 결계를 없애 서부를 초토화할 예정이었다.

‘지금은 저 쥐새끼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지만.’

샬롯은 자신의 수정구로 에린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조금 희뿌연 구슬 속에 에린의 모습이 보였다. 헬릭스와 이시스를 자신의 뒤에 둔 그녀는 쉼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샬롯이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역시나 멍청하고 한심한 인간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들을 지키겠다고 마물들을 막아선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래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곧이어 벌어진 광경에 샬롯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뭐야? 너였어, 에린 리서스?”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물들을 베어 내는 에린의 검이 매서웠다. 수정구를 통해 지켜보는 샬롯의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다.

그녀의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그동안 몰랐을 수밖에 없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드 마스터를 찾기 위해 샬롯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소드 마스터와 근접할 실력에 도달했던 자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조사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소드 마스터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대체 페르딘을 돕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어떻게 매번 그들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샬롯과 후작 부인은 에린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에린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사람은 그 누구도 그녀가 소드 마스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검을 한 번도 잡아 보지 못했던 계집애가 소드 마스터라고?

‘가능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지금, 살롯의 눈앞엔 그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에린의 검에 마물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던 걸작들이었다.

“당장, 당장 해치워야 해. 저 괴물 같은 년…….”

샬롯은 지금을 놓친다면 영영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당장 저 괴물 같은 에린 리서스를 죽여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이곳에서 살아나간다면 다음엔 얼마나 큰 재앙으로 돌아올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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