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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64화 (64/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64화

에린은 이시스를 뚫어질 듯 바라봤다. 항상 보기 좋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는 일자로 내려가 있었고 눈빛에는 경계심이 엿보였다.

그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에린도 모르진 않았다.

아마 경계를 하고 있겠지. 그녀가 황제와 디트리온의 편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 이후로 대화를 주고받진 않았다. 그들은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과정에서 헬릭스는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보다 위험 지대가 조용했다.

원래라면 중급 마물이 몇 마리를 마주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상함을 느낄 정도로 별다른 마물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군.’

그가 그렇게 느낄 때였다.

“도착했군.”

이시스의 말에 헬릭스가 앞을 바라봤다. 그들의 목적지인 보육원이 있었다.

그들이 막 보육원에 들어섰을 때였다. 이시스가 에린을 돌아봤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확실히 해야 할 일이 있지.’

그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녀에게 제일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에린 리서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하고 가죠. 당신이 페르딘 전하께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에린은 대답 대신 검을 내질렀다.

그녀가 검을 꺼내는 모습을 보며 헬릭스 역시 발검했지만, 에린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순식간에 이시스를 향해 날아온 검은 그를 지나 그 뒤에 있던 무언가를 찔렀다.

이시스가 놀란 채, 뒤를 돌아봤다. 에린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녀의 검 위로 마물의 피가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뭔가 이상하네요.”

에린이 인상을 쓴 채,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시스 역시 위화감을 느꼈다.

“마법? 이 정도의 대단위 마법이라고?”

무언가가 그의 정신을 교란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뭐지?’

신성력이 아니었다면 마법인 걸 파악하기도 전에 당했을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었다.

심지어 몸을 감싼 신성력을 몰아내겠다는 듯 강력한 기운이 그의 정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시스는 당황한 얼굴로 급히 에린을 돌아봤다. 헬릭스와 그에겐 신성력이 있어 버틸 수 있으나, 평범한 기사인 에린은 힘들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에린의 텅 빈 두 눈이 보였다.

헬릭스가 다급히 이시스를 붙든 채 외쳤다.

“이시스, 당장 신성력을 사용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이시스는 에린의 어깨를 붙들고 신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 * *

에린은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게 환상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환상에 먹혀 버렸을 정도로 생생했다.

대상의 정신을 과거의 기억 속에 가둔 채,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악질적인 마법이었다.

에린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리서스 후작성. 그녀의 집이자 모든 악몽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페르딘?’

언뜻 보이는 사람의 형체에 에린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페르딘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 끔찍한 악몽이라는 걸 계속 상기시키고 있음에도 에린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에린 경.”

페르딘이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발밑에 누군가의 해골이 굴러다녔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에린은 자신의 발밑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칼립스, 아몬, 릴리아, 그 외의 수많은 사람들…….

‘역시 악몽이구나. 확실해.’

그녀의 발밑에 있는 시체들은 모두 에린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페르딘이 죽은 뒤, 그녀가 항상 꾸던 악몽…….

시간이 되돌아온 이후로는 꾼 적이 없었지만, 이전 생에서도 지긋지긋하게 경험한 상황이었다.

에린은 앞으로 벌어질 일도 알고 있었다. 페르딘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두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

그는 에린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상대방을 홀릴 듯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언제나 꿨던 그 꿈처럼, 그가 말했다.

“당신이 죽인 겁니다.”

모든 게 거짓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린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대로 굳은 채, 페르딘만을 보고 있었다.

과거에 그녀는 꿈속의 페르딘에게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당신이 죽고 나서, 잠들 때마다 차라리 이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대로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페르딘이 보고 싶으면서도 보기 싫었다. 꿈속에서라도 그를 볼 때면 가슴이 미어져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제가 만약 후작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당신도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이…… 좀 더 나았을까요?”

의미 없는 가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에린은 웃었다.

“죽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녀는 죽음 끝에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에린은 무언가가 자신의 발을 단단히 옭아매는 듯한 느낌에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체들이 그녀의 발을 끌어당기는 게 보였다.

에린이 천천히 검을 들자 페르딘의 환상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절 또 죽이려고요?”

그의 말에 에린이 슬퍼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 * *

에린의 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시스는 멍하니 에린을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의 팔을 스스로 베어 냈다.

깊게 베인 팔에서 붉은 피가 뚝, 뚝 흘러내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던 에린의 행동에 이시스는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에린이 그런 이시스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이시스는 신성력을 이용해 에린이 정신을 차리도록 도우려 했다. 고약한 정신 마법일수록 빨리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영영 그 안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보고 있는 환상을 아주 잠깐 엿보게 됐다.

‘내가 본 광경은 뭐였지……?’

주변에 널린 시체들. 그리고 앞에 있는 페르딘 대신 자신을 베는 걸 선택한 에린.

대체 왜? 환상에 홀려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까? 흑마법이 그녀의 정신을 조종해 팔에 상처를 내게 한 걸까?

하지만 이시스는 이내 그녀가 놀라울 정도로 제정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에린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투명했다.

이 정도의 마법에 정신을 잃지 않고 저항한 것은 손뼉을 칠 만큼 대단한 일이었지만, 마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극단적인 선택은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다.

“당신…….”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 이시스와 헬릭스를 무시하며 에린은 자신의 옷을 거칠게 찢었다. 그러고는 무성의하게 자신의 상처를 동여맸다.

언제나 가면을 쓴 듯 웃고 있던 이시스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에린에게 물었다.

“미친 겁니까?”

이시스가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러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에린은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치유하지 마세요.”

“……?”

“그래야 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이시스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에린의 하얀 옷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에린 경, 괜찮습니까? 많이 다친 거 알지만……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군요. 갑자기 마물 떼가 등장했습니다.”

헬릭스의 말에 이시스도 정신을 차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마물 떼를 본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마물 떼가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겠으나 지금 이대로 있다간 그들은 전부 죽게 될 게 분명했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었다.

서부에 있는 사람들 전체가 위험했다.

크르륵!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물을 칼로 베어 낸 헬릭스의 얼굴이 굳었다.

검에 신성력을 담았음에도 휘두른 칼에 닿는 저항감이 심상치 않았다.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었다. 최소 중급 이상의 마물이었다.

“갑자기 이 정도의 마물 떼가 등장할 리는 없어…….”

헬릭스가 이시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것들이 어디서 나온 거지? 근처에 마물 떼가 발생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아마 이곳의 지하인 거 같습니다.”

이시스는 발밑의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는 더러운 기운에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헬릭스는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이를 악물었다. 이시스가 말한 지하 어딘가에 자신들이 찾아 헤매던 단서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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