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59화
에린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페르딘의 부고를 듣고 매일같이 우는 바람에 이제는 눈물이 메말라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착각이었나 보다.
막혀 있던 둑이 허물어진 듯,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제가 그렇게 나빴나요……?”
에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한평생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모두의 비난을 받으며 살아왔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몰랐다.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차라리 이유라도 알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 포기할 수 있을 텐데, 그리 생각했었다.
“제가 그렇게 싫으셨어요?”
“에린, 정말로 가엽구나.”
코렐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말렴. 외롭게 혼자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
“네 가족들도 곧 뒤따라갈 거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코렐리아의 옆에 서 있던 레이먼이 다가왔다.
“너를 먼저 죽이고, 네 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하는 순간을 언제나 꿈꿔 왔는지 넌 모를 거야.”
그녀는 고개를 숙여 에린에게 에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네 아버지가 정말 싫었어, 에린.”
“…….”
“매번 말로만 고맙다고 지껄이는 게 얼마나 같잖던지. 사실 너보다 후작을 더 먼저 죽이고 싶었지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의 그 얼빠진 얼굴을 보기 위해 참았단다. 꼭 보고 싶었거든.”
“…….”
“너는 이곳에서 죽을 거야, 에린. 그러고 난 네 아버지에게 가서 이렇게 말할 거란다.”
“…….”
“사실 이제까지 벌어진 모든 일은 에린이 한 게 아니었어요. 내가 전부 꾸민 일이었답니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네요. 당신 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 아아…….”
코렐리아가 발에 힘을 주자 에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코렐리아의 얼굴만 바라봤다.
미련하고 바보 같은 에린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코렐리아는 애초에 그녀가 어떠한 노력을 하든 사랑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코렐리아의 사랑을 받는 건, 그녀가 노력해도 되지 않을 일이었다.
“레이먼, 처리해. 난 카론을 처리하러 갈 테니까.”
레이먼이 검을 꺼내 드는 게 보였다. 그녀가 믿었던 모든 것들은 허상에 불과했다.
레이먼의 검이 에린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목이 미칠 듯이 아파 왔지만 바로 눈을 감지는 못했다.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슬퍼서인지, 너무 아파서인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긴 시간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에린은 저주했다.
그녀의 저주 대상은 코렐리아도, 레이먼도 아니었다.
멍청하고 무력한 자신이었다.
에린은 감았던 눈을 떴다.
힘들어질 때마다 그때를 떠올렸다. 웃기게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힘이 났으니까.
‘아버지는 괜찮으실까?’
에린은 자신이 힘을 드러낼 계획을 짰을 때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맘때쯤 후작가로 돌아오는 걸 에린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힘을 드러내고, 코렐리아를 자극함으로 인해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후작이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것일 테다.
‘하지만 아버지를 함부로 건드리진 못할 거야.’
아직 황제는 리서스 후작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리서스 후작가를 건드리는 것은 모든 준비가 끝나서였다.
최소한 아직 몇 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후작은 아실리 공작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가 공작가 영지에 들를 때마다 아실리 공작이 직접 후작을 만나러 가는 건 유명한 일이었다.
그 때문이라도 코렐리아는 아버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린이 애써 마음을 다스릴 때였다.
똑똑.
기숙사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돼?”
“카론?”
에린이 방문을 열었다.
며칠 보지 않은 새 카론의 얼굴이 홀쭉해져 있었다.
“누님이 서부로 승급전을 떠난다는 말을 들었어.”
“…….”
“아실리 공작님이 폐하께 말씀드리겠다는 걸 거절했다는 말도 들었고.”
“…….”
“누님이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 우리에게 어떤 적이 있는지, 혼자서 어떤 짐을 지고 있는지…….”
그렇게 말한 카론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에린은 그가 자신을 막으러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벗어나는 말이었다.
“막지 않을게.”
“카론?”
그렇게 말하며 카론이 에린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누님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다만, 언젠가…….”
“…….”
“언젠가 내가 믿을 만할 정도로 강해지면 꼭 말해 줘.”
“…….”
“무슨 말을 하든 믿을 테니까.”
에린은 한참 동안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존심 세고, 무뚝뚝한 카론이 이런 말을 하다니. 과거엔 상상하지도 못할 말이었다.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했음에도 자신을 찾아와 준 그를 바라보며 에린은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카론은 에린의 기세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꼭 말해 줄게.”
“…….”
“날 믿어 줘서 고마워, 카론. 꼭 돌아올게.”
그 말은 맹세와도 같았다.
에린의 두 눈에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서부에 무엇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건,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와 카론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그녀는 자신을 믿어 주는 남동생을 위해 다짐했다.
* * *
샬롯은 뛰어난 흑마법사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수정구를 확인했다. 제국 각지에 퍼져 있는 흑마법사들이 빠르게 정보를 수집해 전달해 주고 있었다.
“에린 리서스가 서부 지역으로 승급전을 떠난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습니다.”
“후작도 소식을 전달받았겠군.”
코렐리아는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머리, 화장 모든 게 다 완벽했다.
이 지긋지긋한 연기를 마무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후작이 있을 집무실을 떠올렸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후작이 후작성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황제와 대화한 날 이후부터 코렐리아는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들려오는 에린의 소식에 그녀가 미소 지었다.
“에린이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걸까?”
“…….”
“이젠 상관없긴 하지만.”
그 말을 남긴 코렐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후작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이미 후작성의 사용인들 대부분이 그녀의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황제의 사람이었지만.
“후작님! 에린 아가씨가…….”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에린이 서부 지역으로 승급전을 떠나다니!”
후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코렐리아가 들려오는 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후작은 아직도 자신의 딸이 약하기만 한 귀족 아가씨인 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사랑하지만, 표현하거나 관심을 쏟을 줄 모르는 남자였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뒤 반쯤 일에 미쳐 살았으니까.
그리고 그게 어떤 비극을 만들어 냈는지 여전히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코렐리아는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후작과 전령 그리고 후작이 아끼는 기사 레켄 경이 보였다.
“부인?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후작은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향하려는 듯, 제복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물론 코렐리아는 황제를 귀찮게 할 그의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또…… 에린이 사고를 쳤군요.”
“이번엔 에린이 의도한 게 아니오! 폐하께서 아이에게 부당한 임무를 내리셨어. 이건 말이 안 된다고. 당장 황궁으로 가야겠소.”
코렐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손수건으로 메마른 눈가를 닦았다.
그녀는 후작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정말로 구제 불능이죠? 하지만 에린보다 더 멍청한 사람이 있어요. 바로 당신이요, 로이드 리서스.”
그 말에 후작은 코렐리아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사실 에린은 참 착한 아이랍니다. 그 아이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을 비난하는 남동생마저 사랑하죠.”
그녀는 쥐고 있던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러고 나선 망설임 없이 손수건을 밟았다.
그와 동시에 샬롯이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던 코렐리아의 손이 순식간에 굳은살이 박인 기사의 손으로 변했다.
후작은 그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부…… 부인,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별일 없이 서부 지역으로 떠나게 될 거예요.”
코렐리아의 말에 후작의 얼굴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