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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57화 (57/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57화

* * *

아텐츠 아카데미의 학부생들을 보며 아실리 공작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재가 없어도 너무 없어.”

상급반을 돌아봐도 그의 마음에 차는 재능을 지닌 자들이 없었다.

‘저번 마물 토벌 때 마물 떼를 죽인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게 아쉽군.’

그 정도의 기사라면 그의 상대가 될 수 있을 텐데. 세상에 기인은 많고, 숨어 있는 실력자들도 몇 있을 게 분명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적수가 될 실력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공작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봤던 에린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그 범상치 않은 기세. 연회장에서 공작은 에린을 보며 머리가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장소에 있는 기사들 전부가 에린을 보며 놀랐을 것이다.

그녀의 기세는 한낱 초급반의 검술 학부생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에린을 볼 때면 아실리 공작은 왠지 모를 이상한 감각을 느끼곤 했다. 그건 말로 표현하지 못할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내 제자가 되라 말해 볼까.’

그래서 그의 수석 기사가 가져온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공작님, 황제 폐하께서 에린 경에게 승급전의 임무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승급전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네, 게다가 그 임무가 서부에서 수행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서부로 승급전을 떠나게 한다고?”

수석 기사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앞날이 기대되는 기사들은 아카데미에서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황제는 기이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고는 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에게 위험한 승급전 임무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살아 돌아온다면 엄청난 영광을 얻게 되겠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부로 승급전을 명하다니. 그 땅이 얼마나 위험한지 황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검의 선택을 받은 유능한 인재를 그런 곳에 보낼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임무다. 내가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지.”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수습 기사가 허둥지둥하며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공작님. 저번 아몬 경의 승급전 때도 황제 폐하의 의견에 반대하셔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셨습니까. 참으셔야 합니다.”

“검의 선택을 받은 인재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네. 당장 황궁으로…… 아니지. 먼저 에린과 대화를 해 보는 게 맞겠어.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수습 기사는 그 말에 내심 안도하며 당장 찾아오겠다고 답한 뒤 집무실을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줘야겠군.’

괜한 일로 에린이 심란함을 느껴 검술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는 걸 공작은 원하지 않았다.

‘빨리 실력이 늘어야 하니까.’

아실리 공작은 에린이 언젠가 자신과 대등한 기사로 성장할 거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럴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집무실을 들어온 에린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는 순간, 아실리 공작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에린 경, 뭐라고 했나.”

“서부의 승급전을 치르러 갈 생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천재들은 왜 하나같이 오만한가. 아실리 공작은 그 사실이 안타까웠다.

“서부 지역의 마물은 다른 데보다 더 강해. 아직 경이 갈 만한 곳이 아니다. 특히 상급반으로 가는 임무를 치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지.”

“…….”

“중급 마물의 목 셋을 베어 와야 해. 애초에 완수하라 내린 임무가 아니다. 경이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몬 헤도르를 꺾었다고 들었다. 실로 놀라운 재능이지. 그 재능이 아깝지 않나? 아무리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목숨을 낭비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아주 가끔 자신의 실력을 맹신한 기사들이 서부 지역으로 승급 시험을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가 있었다. 자신들의 강함을 증명할 가장 좋은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아실리 공작이 생각할 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에린 리서스도 그런 유형의 기사인가.’

공작은 착잡함에 눈을 감았다. 적당한 오만함은 필요하지만 스스로 과신하는 기사는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눈여겨볼 정도의 재능을 지닌 에린이 그러한 자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무엇을 걱정하시는 건지 압니다. 하지만 기회를 주세요.”

아실리 공작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

“그렇게 원한다면 기회를 주지.”

그는 에린을 결코 서부 지역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아직 제 한계를 잘 모른다 한들, 재능 있는 기사를 잃고 싶진 않았으니까.

“검을 들어라, 에린 경. 내 검을 십 합만 막아 낸다면, 서부로 가는 걸 허락하지.”

하지만 공작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의 이런 반응을 에린이 원하고 있었다는 걸.

* * *

아텐츠 아카데미를 떠난 코렐리아가 향한 곳은 리서스 후작가가 아니었다.

코렐리아는 황성 안에 마련된 온실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황제가 은밀히 만날 때마다 사용하는 장소였다.

코렐리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음미했다. 온실 안에는 짙은 죽음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사체로 쌓아 올린 온실. 코렐리아는 손 닿는 곳에 있는 식물의 줄기를 꺾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꺾이는 모습이 마치 에린의 모습 같았다.

‘그래, 분명 이랬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에린이 언제부터 바뀐 것일까?

“코렐리아.”

황제의 기척에 코렐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 자신의 수석 기사들을 데리고 온실 안으로 들어오는 황제가 보였다.

“카론 리서스가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어떻게?”

코렐리아는 연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

“이제 리서스 후작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안 그래도 자네의 급보를 받고 에린 리서스의 승급전을 명령해 두었어.”

황제는 코렐리아가 정기적으로 보낸 보고를 통해 에린이 어떤 짓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나 근골이 망가졌으니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최근의 소문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황제는 제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라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코렐리아에게 벌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에린의 재능이 개화하는 중이어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가 생각한 대업의 준비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으니까.

“네, 안 그래도 조만간 서부를 정리할 예정이었으니까요. 샬롯을 보냈으니 확실하게 모든 걸 끝내 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뭐, 마음대로 하도록.”

원래라면 조금 더 미래에 일을 벌였겠지만, 코렐리아의 말이 일을 앞당겼다.

“어차피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는 건 아실리 공작이 아니면 불가능해.”

“아실리 공작이어도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그래, 그러니 에린 리서스는 절대로 살아 돌아오지 못하겠지.”

“리서스 후작이 반대하면 어떻게 할까요?”

코렐리아의 질문에 황제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슬슬 리서스 후작가를 정리해라, 코렐리아. 준비는 이제 충분해.”

“…….”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코렐리아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건 그녀가 오랜 세월 기다려 오던 말이었다.

* * *

아실리 공작은 에린과 함께 아카데미 내에 마련된 자신의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그의 편의를 위해 아카데미 측에서 임시로 마련해 준 연무장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수석 기사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아실리 공작님의 대련이라니!’

수석 기사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대련 상대는 ‘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알려진 에린 리서스였다.

물론 실력 차이가 나는 만큼 지도 대련이 될 게 분명했으나 수석 기사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실리 공작이 누군가와 대련하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석 기사의 기대감과는 무관하게 아실리 공작은 이 대련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대련을 즐기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 그에게 다른 이와 겨루는 것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제국 내에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합공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소드 마스터 사이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기사가, 그것도 소드 마스터 두 명이 수치스럽게 합공할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아실리 공작에겐 긴장감 있는 대련을 한 게 매우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는 수석 기사를 향해 말했다.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그 말에 수석 기사가 시무룩해진 기색으로 연무장을 벗어났다.

공작은 그제야 에린을 향해 물었다.

“이제 네 진심을 말해 봐라, 에린 경. 대체 무슨 생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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