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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56화 (56/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56화

전대 성녀는 항상 그에게 정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헬릭스는 그녀의 말을 믿고 있었다.

언젠가 페르딘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며, 자신이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가 아카데미에 와서 페르딘의 약혼 소식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헬릭스는 데렉과 마찬가지로 아실리 공녀와의 연애가 거짓인 걸 아는 자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페르딘 전하와 약혼한 그 악녀 말이야.”

“아, 검술 학부로 전과한 에린 리서스?”

“요즘은 통 잠잠하네? 원래 패악을 부리기로 유명했잖아.”

그 소식을 들은 헬릭스는 불안에 휩싸였다.

‘페르딘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 악녀에게 겁을 먹고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헬릭스 경! 듣고 있어요?”

헬릭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공녀를 바라봤다. 그를 주목하고 있는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

페르딘도 아몬도 그를 좋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카론 리서스는 그를 무슨 쓰레기인 양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에린 경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 말씀하십시오.”

헬릭스는 이번 대의 성녀인 공녀를 따르진 않았으나, 아무리 그래도 성기사였다.

성녀인 그녀가 자신을 향해 화를 내는 것만으로도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썼다.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분명 패악을 부리는 악녀라고 들었는데?’

하지만 지금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원들은 마치 에린 리서스가 정말로 페르딘의 약혼녀라는 듯이 굴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그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페르딘이 헬릭스를 향해 말했다.

“헬릭스, 에린 경께 다시 무례를 저지른다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아.”

페르딘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론이 끼어들었다.

“쓰레기 자식.”

그의 말을 들은 헬릭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카론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카론은 며칠 밥을 못 먹은 듯 초췌한 안색이었다. 헬릭스는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는 주제에 자신에게 살기를 띠는 그가 가소로웠다.

하지만 페르딘이 그런 카론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도 카론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단 뜻이리라.

“헬릭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야. 나를 위한다는 말로 그녀를 상처 입히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 이건 명령이야.”

“…….”

“에린 경을 만나면 진심을 담아서 제대로 사과하도록 해.”

중앙 홀이 조용해졌다. 그의 말에 헬릭스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몬과 카론 역시 고개를 숙였다. 그 속에서 데렉만이 안절부절못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페르딘이 헬릭스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알아냈으니 아카데미로 돌아온 거겠지.”

다른 기사단원들의 시선을 느끼며 헬릭스가 말을 꺼냈다.

“서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들…… 거기에 황제가 엮인 거 같습니다.”

서류를 넘기던 페르딘의 손이 멈췄다.

“조사를 통해 황제가 옛날에 부모 없는 아이들을 어딘가로 데려간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그것 외에도, 그 당시 검을 좀 쓴다고 하는 용병들이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실종되기도 했고요.”

페르딘은 강한 의문을 느꼈다.

황제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안타까워할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그들을 어딘가로 데려갔다고?

그리고 때마침 벌어진 실종 사건들도 공교로웠다. 데렉이 불안한 듯 물었다.

“페르딘, 네 말대로 황제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페르딘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상하네, 기척이 느껴진 거 같았는데.’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 근처에 허락받지 못한 이가 들어올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말을 꺼냈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페르딘의 두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조만간 큰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단 예감이 들었다.

* * *

페르딘이 느낀 기척은 에린이었다. 그녀는 중앙 홀의 지붕 위에 앉은 채, 페르딘과 그의 예비 기사단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그의 명령까지 엿들어 버렸다.

“나를 위한다는 말로 그녀를 상처 입히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

과거에도 그는 항상 그랬다. 에린이 받는 부당한 대우나 비난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진 것과 별개로 에린은 그가 서부 지역에 신경 쓰지 않길 바랐다.

그녀는 헬릭스가 말한 실종 사건을 곱씹어 생각했다.

‘헬릭스가 사라지는 게 정확히 이때였구나.’

헬릭스 이그자르트는 저 보고를 끝으로 서부로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그대로 실종되어 버려 페르딘과 신전이 그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물론 페르딘이 서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린의 두 눈이 차가워졌다.

‘페르딘이 죽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몇 년 뒤, 서부는 마물들로 뒤덮인 죽음의 땅이 된다.

그리고 페르딘은 황제의 명령으로 그곳의 마물을 소탕하러 갔다가 죽게 됐다.

헬릭스가 이번 아카데미 방문에 어떤 소식을 가져왔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 * *

디트리온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에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눈빛을 본 디트리온은 궁금해졌다.

‘과연 이 말을 듣고도 똑같을까?’

그의 손에는 황궁에서 온 서신이 들려 있었다.

“에린, 승급 시험을 치르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떨어졌어.”

그와 에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넌 서부, 그곳으로 가게 될 거야.”

디트리온은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괸 채 에린의 반응을 기다렸다.

놀랄까? 예전처럼 도와달라고 말할까?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에린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들려온 말에 디트리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알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디트리온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덧붙인 말도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긴 마찬가지였다.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간다고?”

“네.”

에린의 대답에 디트리온은 헛웃음을 쳤다.

“죽고 싶은 건가? 서부로 승급전을 가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살고 싶다고 말해, 에린.”

“…….”

“살고 싶다고 말하면, 살려 줄 수도 있어.”

“…….”

“폐하께 내가 특별히 부탁드리지. 더 쉬운 임무를 받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의 말에 에린은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죽고 싶지 않잖아? 자존심은 한순간일 뿐이야.”

디트리온을 잠시 쳐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저를 위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단호한 말투였다. 자신의 죽음 따위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에린의 눈을 홀린 듯 바라봤다.

“더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린은 그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그가 가라고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원래라면 디트리온은 그녀가 등을 보인 순간 화를 냈을 것이다.

감히 자신을 무시하고 나가느냐고. 당장 기사를 불러 에린을 모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느낀 것은 깊은 허무함이었다. 지금 이 방에서 나가는 순간 에린 리서스는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진짜로 죽겠다고?’

에린 리서스는 언젠가 처리해야 할 적이었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는 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렇게 가다니.

“어리석어.”

그 말을 끝으로 디트리온은 더는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는 기회를 줬고, 그 기회를 걷어찬 건 에린이었다.

‘그런데 왜지?’

디트리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워지는 걸 느꼈다.

* * *

디트리온과 헤어진 에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미래가 또 변한 건 확실했다. 과거엔 황제가 자신에게 서부로 가라는 임무를 내린 적이 없었으니까.

‘어떤 행동 때문에 미래가 변한 걸까?’

연회에서 만났던 코렐리아의 경계심 어린 눈이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치워 버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날 죽일 생각인가.’

과거보다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그들의 행동에 에린은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어차피 아카데미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서부에서 페르딘이 죽은 만큼 그곳에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에린은 만들어진 판을 거절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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