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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54화 (54/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54화

지금의 에린은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가 본 그녀는 여린 사람이었다.

페르딘의 머릿속엔 아직도 고양이의 묘지 앞에서 서럽게 울던 소녀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과 어제 에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페르딘의 심란한 모습을 보며 눈치를 보던 데렉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페르딘, 릴리아가 바한과 함께 오늘 떠났어.”

그 말에 페르딘이 데렉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릴리아가 남긴 편지를 페르딘에게 건넸다.

릴리아가 마탑으로 떠나겠다고 말을 한 건 파티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난 칼립스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겠어. 아무래도 후작 부인이 뭔가를 더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에린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하니 마탑으로 가서 직접 알아보려고. 그리고 그곳에서 고행길을 가려고 해.”

“…….”

“에린에겐 말하지 말아 줘…… 난 그 애에게 속죄해야 하니까.”

릴리아가 언젠가 마탑으로 향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만 계속하길 원하기만 한다면 마탑의 소속이 된다고 해서 그의 기사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페르딘은 릴리아를 보내 줬다. 그녀가 조용히 떠나고 싶어 한단 사실도 존중해 주었다.

릴리아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에린에게 속죄해야만 했다. 이는 릴리아의 사정이 안타깝다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마탑의 고행길은 대대로 마법사의 무덤이라고 불렸다. 마탑주가 내는 과제를 완수해야만 했다.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일반인들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행길을 끝마친다면, 마탑의 힘을 자유롭게 빌릴 수 있는 엄청난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그건 마탑주가 인정한 ‘재능 있는 마법사’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아니니까.’

몰랐다고 울면서 매달린다고 한들, 에린이 당한 과거가 사라질까?

릴리아는 에린의 누명을 완전히 벗기는 걸로 에린에게 최소한의 속죄를 하러 떠난 것이다.

생각에 빠져 있던 페르딘은 데렉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아, 그리고 오늘 헬릭스에게서 전령이 왔었는데…….”

“헬릭스에게서? 뭔가 알아낸 게 있는 건가?”

데렉의 말에 페르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음, 잠시만…….”

데렉이 헬릭스에게서 온 전서를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페르딘 역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데렉의 손에 들린 전서를 가져갔다.

[돌아갑니다.]

헬릭스 이그자르트다운 간단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말에 페르딘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에린이 위험했다.

* * *

에린은 어젯밤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등을 자상하게 쓰다듬어 주던 페르딘의 손길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를 위로하던 그의 따뜻한 손길, 자상한 한마디…….

이번 생은 그런 그를 지키기 위해 살아난 것이다. 에린은 어젯밤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힘들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세요.”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눈물을 자상하게 닦아 줬다.

‘행복했어…….’

사실 눈물은 이미 반쯤 마른 지 오래였다. 계속해서 슬픔에 빠져 있기엔 그녀는 감정이 과거보다 메말랐으니까.

하지만 페르딘이 위로해 주는 게 좋았다. 그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오늘 너무 힘들었으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그런 욕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였다.

이제 다시는 그때처럼 눈물을 흘릴 일이 없을 것이다.

에린은 자신의 검을 들었다. 아몬이 그녀의 옆에서 검을 휘두르며 훈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 이 시기의 아몬과는 달랐다. 그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의 검에서 강렬한 파공음이 들렸다. 에린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아몬의 검이 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맘때쯤 헬릭스 이그자르트가 아카데미에 왔었지.’

헬릭스 이그자르트. 전대 성녀의 마지막 남은 성기사.

일반적으로 성력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다. 그렇기에 성기사와 사제로 자라날 가능성이 큰 아이들은 일찍이 부모와 떨어져 신전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뛰어난 몇몇은 성녀의 손에서 자라났다. 헬릭스 역시 뛰어난 성력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성녀의 옆에서 자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열다섯 살 되었을 때 신성력과 검술의 재능을 인정받아 성기사가 된 사람.’

열다섯 살의 나이에 성력으로 마물을 퇴치했다고 들었다.

성기사 중 최연소의 나이였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성기사가 됐고 그 이후로도 서부로 가 마물 퇴치에 앞장서고 있었다.

전대 성녀가 죽었을 때, 대부분의 성기사들이 신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헬릭스 이그자르트만은 신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페르딘의 곁에 남았다.

성녀가 남긴 마지막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과거에 그는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날 찾아왔었어.’

헬릭스는 이상할 정도로 에린을 싫어했다. 다른 기사단원들이 페르딘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나마 그녀를 지키려고 한 것과는 달랐다.

그는 에린의 곁에 있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 탓에 그의 노란 눈을 볼 때면 에린은 이유 없는 공포에 몸을 떨고는 했다.

“에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느새 훈련을 끝마친 아몬이 에린을 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파티에서 무슨 일 있었어?”

딱히 그랬던 거 같지는 않은데. 아몬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기는 했다. 그녀가 그동안 숨겨 온 힘을 드러냈으니까.

아몬도 주변의 기사들이 에린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원래는 에린을 편하게 대했던 녀석들이 어딘가 경외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걸 드러냈지. 소드 마스터인 걸 알고 있다 보니 잊고 있었어.’

그녀가 만약 소드 마스터란 사실까지 알게 되면, 온 나라가 뒤집힐 것이다.

미래의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만으로도 다들 에린을 어려워하고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다들 곧 익숙해질 거야.”

아몬이 그녀를 위로했다. 그 위로의 말을 들으면서 에린은 옅게 웃었다.

익숙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조만간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그때 아몬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검이 부딪히는 소리로만 가득했던 연무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예비 기사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에린은 어렵지 않게 헬릭스가 연무장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연무장에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헬릭스 이그자르트?”

“대체 무슨 일이지?”

“기세가…… 정말 대단하군.”

초급반의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두 눈에 헬릭스에 대한 선망이 담겨 있었다.

그들과 비슷한 또래인데도 헬릭스 이그자르트는 성기사로서 여러 가지 업적을 쌓은 어엿한 기사였다.

아몬이 항상 페르딘의 옆에 머무르며 그를 보좌했다면, 헬릭스는 최전선에서 페르딘의 입지를 늘려 나갔다.

에린은 가까이 다가오는 헬릭스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저 나이에 엄청난 실력이야.’

헬릭스는 강했다. 현재의 실력으로 보자면 아몬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미래에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린은 그 사실을 떠올리며 헬릭스를 바라봤다. 귀공자 같은 외모에 하는 걸음걸이에도 기품이 흘렀다.

그러나 이어진 헬릭스의 행동에 그를 지켜보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에린에게 장갑을 내던졌다.

에린은 헬릭스의 장갑을 가뿐히 받아 냈다. 그 광경을 본 헬릭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에린 리서스.”

* * *

아실리 공녀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성녀의 옆에는 수척한 얼굴의 카론이 앉아 있었다.

아카데미 내에 만들어진 신전의 기도실. 수업이 한창인 낮이라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카론은 에린이 했던 말을 잊지 못한 상태였다. 에린의 말을 들은 이후 그는 자신을 혹사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성실했던 그는 며칠 전부터 검술 학부 수업도 빠진 채 신전에 와 기도하거나 밤늦게까지 무리해서 검을 연마했다.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이 그를 의아하게 볼 정도였다.

“만약 네가 그런 짓을 한다면 코렐리아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

“넌 아직 약해, 카론.”

에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더 없이 객관적일 것이다.

그가 에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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