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53화 (53/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53화

그는 조심히 에린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에린 경,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네, 많은 일이 있었죠.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어요…….”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페르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에 페르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마치 깨지기 쉬운 보석을 만지듯, 에린을 토닥였다. 언제나 그랬듯 상냥한 사람이었다.

‘페르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다만 그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에린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자신에게 하는 다정한 행동들이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전생에서 에린은 그의 동정을 좋아했다. 페르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다정함이 그녀를 살아가게 했다.

‘이번 한 번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 행동으로 페르딘이 자신을 피할지도 몰랐다. 갑작스럽게 다가간 것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에린은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순간이라도 페르딘과 더 있고 싶었다.

사실은 먼 옛날부터 이러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그의 숨소리를 듣고…… 그가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다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만약 평범하게 사랑받고 자랐다면, 그녀는 꽤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라다니, 너무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평생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하고 싶은 것도 참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마음껏 사랑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지금은 페르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페르딘 경,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

“조금 어처구니없을 수도 있겠지만…… 꼭 이기적으로라도 살아남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에린 경?”

페르딘은 에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린과 두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왜, 저렇게 슬픈 눈으로…….’

그리고 그때, 페르딘은 문득 에린이 건넨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것 같았다. 페르딘은 곧 자신의 이능이 발휘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강한 두통이 일어났다.

눈앞에 보이는 과거에 페르딘은 깨달았다.

그래, 언젠가 그와 에린은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금과는 약간 달랐지만…… 매우 비슷한 대화였다.

“페르딘 경,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꼭 살아 돌아와 주세요.”

“…….”

“돌아오시면,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저랑 약속해 주셔야 해요. 꼭 힘내서 돌아오시겠다고.”

갑작스럽게 이능이 사용되자 페르딘이 인상을 썼다. 에린은 그런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페르딘이 인상을 쓰는 게,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부탁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린 경, 그건…….”

문득 정신을 차린 페르딘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자 에린이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순간, 페르딘은 숨을 쉬는 법을 까먹었다. 그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을 맴돌았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해 따위 눈감고…… 버려야 될 패는 버리고…….”

에린의 얼굴이 서서히 그에게 다가왔다.

“당신의 목숨만을 생각해 주세요. 그렇게 살아남아 주세요. 네?”

페르딘은 그가 이때까지 의심했던 사실을 물어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에린에게 다시는 이 질문을 하지 못할 거란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에린 경,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

“혹시 당신과 제가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나요?”

페르딘을 보고 있던 에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과거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페르딘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과거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에린은 두려워졌다.

“제게 살아 돌아오면…… 할 말이 있다고 하신 적이 있나요? 혹시 에린 경은 이 기억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과의 마지막 장면을 봤다는 건, 과거에 왜 그가 죽었는지도 곧…….

에린이 자신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네, 페르딘 경. 저는 알고 있어요.”

“…….”

“모든 걸…… 알고 있어요.”

에린의 말에 페르딘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보통 신의 계시로 미래를 아는 사람을 성녀라고 부르지만, 이미 아실리 성녀가 있는 이상 또 다른 성녀가 나타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미래를 알게 된 걸까? 왜 사람들에게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는 걸까.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미래에 자신이 죽는다면, 그의 이능이 보여 준 모습과 성녀가 들었다는 신의 계시가 모두 설명이 된다.

어긋나 있던 톱니바퀴들이 조금씩 맞물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연회가 끝나고 봤던 에린의 슬픈 얼굴과 이능을 통해 본 그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렇다면 에린 경은 미래를…… 직접 보신 겁니까?”

페르딘의 질문에 에린이 그것만은 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페르딘은 더 이상 묻는 걸 포기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궁금한 건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그들의 사이였다.

그와 에린은 무슨 사이였을까.

무슨 사이였기에 그의 이능이 보여 준 장면 속 죽어 가던 자신이 에린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걸까?

왜 그녀만 보면 알 수 없이 심장이 뛰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걸까. 어째서 계속 그녀와 대화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걸까.

“하나만 말씀해 주세요. 그 미래에서 저희는 무슨 사이였죠? 제가…… 경을 사랑했나요?”

사실 페르딘은 반쯤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운명을 바꾸기 전의 그 미래에서, 그가 그녀를 사랑했을 거라고.

그래야지만 얼마 전부터 에린을 볼 때마다 뛰는 심장이, 그녀에게 느껴지는 애틋한 감정이 이해가 됐으니까.

페르딘은 과거를 볼 수 있는 그의 이능이 본능적으로 에린을 알아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에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움직임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페르딘의 모든 신경이 에린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에린이 입을 열었을 때 그는 거대한 불더미에 뛰어든 나비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요…… 경은 저를 싫어하셨어요. 저는 지독한 악녀였거든요. 제가 하고 있는 건 그 삶에 대한 속죄일 뿐이에요.”

“제가…… 에린 경을 싫어했다고요?”

페르딘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에린의 말이 진실이라면, 지금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그가 느끼는 정립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절대 싫어했을 리가 없다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저에 대해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게 당신을 위한 일이니까. 저는 버리는 패일 뿐이에요. 그래도 아직 쓸모가 있으니…… 저를 그냥 이용하세요.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사랑한 건 나뿐이었으니,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에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페르딘의 행동에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는 건조한 에린의 눈가를 문질렀다. 마치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는 듯한 행동이었다.

“만약 에린 경이 알고 계신 미래의 제가 당신을 싫어했다면, 저는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었네요.”

“…….”

“에린 경이 얼마나 착하고 자상한 사람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아, 내 삶의 구원자.

페르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린은 자신이 구원받는 걸 느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에린은 페르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엉엉, 아이 같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제가 감히 당신을 사랑해서 미안해요. 당신은 저를 지켜 주려 노력했는데, 저는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페르딘은 그 사과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채 그저 가만히 에린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전…… 정말로 괜찮습니다, 에린 경.”

그 서투른 손길은 그녀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받은 위로 중 가장 자상하고 따뜻했다.

* * *

페르딘의 눈 밑이 퀭했다. 그는 어젯밤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자려고 할 때마다 서럽게 울던 에린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그녀가 지독한 악녀였고, 내가 에린 경을 싫어했다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