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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47화 (47/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47화

카론은 어느새 아카데미의 중앙 홀에 도착했다.

‘이상하네. 왜 경비병이 없지?’

원래 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경비병이 없었다. 하지만 카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홀의 정문을 지나쳤다.

그가 페르딘의 기사단이 있을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때였다.

아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카론이 모를 수 있지?”

문을 열려던 그의 손이 멈췄다. 내가 뭘 모르고 있다는 거지?

그가 미간을 모으고 안에 있는 이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잖아. 등은 몰라도 오른팔에 상처가 났을 때는 티가 났을 거야. 그런데 카론이 그걸 몰랐다고?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잖아. 그걸 몰랐을 리 없어.”

아몬의 말에 릴리아가 대답했다.

“에린은 오빠를 죽인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만 말했어. 그리고…… 후작 부인을 만난 뒤, 오빠가 실종됐다고 했지.”

“…….”

“에린을 학대한 것도 후작 부인일 거야.”

“젠장.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야. 이게 말이 돼?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몰라.”

“…….”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멋대로 그 애를 악녀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끔찍해.”

카론은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저들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게 뛴 나머지, 심장이 아플 정도였다. 카론은 자신도 모르게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아…… 아아…….”

* * *

문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아몬은 벌떡 일어나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카론 리서스?”

그는 놀란 얼굴로 문 앞에 주저앉아 있는 카론의 이름을 불렀다.

카론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아몬은 당황했다.

아카데미의 중앙 홀은 경비병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기 때문에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이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아몬은 아무 회의도 없는 이곳에 누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놀란 건 릴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카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

“당신들이 한 말, 대체 무슨 뜻이냐고! 어머니가 그러실 리 없잖아!”

카론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아닐 것이다. 아닐 거야. 험담에도 정도가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항상 누님을 걱정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론…… 난 에린과 꼭 화해하고 싶어. 내 아이가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사랑스러운 에린이 어떻게 하면 나를 좋아해 줄까?”

어머니는 누님을 좋아했다. 언제나 그녀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고 싶어서 항상 노력하는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누이를 괴롭혔다고?

카론의 말에 아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모든 대화를 듣게 한 건 확실히 주위를 잘 살피지 못한 아몬의 실책이었다.

에린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끔찍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려고 노력했다.

아몬 역시 그런 에린의 의견을 존중해, 누구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론 리서스가 모든 사실을 듣고도 저런 말을 입에 담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카론 리서스.”

아몬은 이를 악문 채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런 다음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는 카론을 일으켜 세웠다.

“네놈, 심각할 정도로 쓰레기구나.”

“뭐……?”

“네가 조금이라도 에린을 생각한다면, 지금 나에게 따질 게 아니라 네 누님에게 달려가야 했어.”

카론은 숨이 막혀 오는 걸 느꼈다.

아몬은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카론에게 숨겨 왔던 비밀을 직접 전해 준 꼴이니 그녀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에 저 얼간이가 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욱 힘들었다.

“아몬, 진정해! 카론 리서스는 아무것도 몰랐어.”

“리서스 후작 부인 때문에 네 누나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네놈이 알아봐!”

아몬은 카론을 거칠게 밀었다.

그런 그의 손길에 저항하지 않은 카론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카론, 네가 행복하면 됐어.”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에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릴리아와 아몬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터무니없는 말을 곧바로 믿을 수는 없었다.

카론이 지금 흔들리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도 에린의 소문에 대해 조금씩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랑족의 토벌 이후 그녀가 했다는 모든 일이 진짜일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쓰러져 있던 카론이 거칠게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만약 이들의 말이 맞는다면 그는 지금 에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거일지도 모른다.

카론은 후작 부인을 만나기 싫어하는 그녀를 외면하고, 거짓말을 했다.

에린은 그가 밤의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카론은 곧장 중앙 홀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론 리서스!”

뒤에서 릴리아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만 했다.

* * *

마치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 카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미친 듯이 뛰어갔다.

그런 카론을 보고 쑥덕거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는 그것보다 에린을 찾는 것에 집중했다.

그녀가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한 카론은 미친 듯이 주변을 헤맸다.

“젠장, 누님! 누님!”

에린이 코렐리아와 만나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그때 그의 눈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에 카론은 잠시 멈춰 섰다.

기숙사 앞을 걸어가고 있는 여자는 분명 에린이 맞았다.

“누님!”

카론은 그렇게 외치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에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카론.”

“내가…… 내가 밤의 정원에서 만나자고 한 거…….”

“…….”

“거짓말이야.”

“알고 있어.”

에린의 말에 카론이 굳었다.

알고 있었다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에린은 그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자신의 기숙사 방이었다.

문을 닫은 에린은 잠시 생각에 빠진 얼굴로 방을 구석구석 살폈다. 며칠 전 로함과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방이 깨끗한 걸 확인하고 카론을 의자에 앉혔다.

그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마물 토벌에 떠나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카론의 앞에 그때처럼 따뜻한 우유가 내밀어졌다.

카론은 그녀가 내민 컵을 꼭 쥐었다. 그의 손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말해야 한다. 그렇게 결심한 카론이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

그렇게 말한 카론은 천천히 에린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얇은 손목이 느껴졌다.

카론의 반응을 보고 에린은 그가 지금까지 숨겨 온 비밀을 알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어머니가 누님을…….”

에린과 카론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불안해하는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아마 그는 자신이 알게 된 게 진짜가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랄 것이다.

코렐리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는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새어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해 삐뚤어진 거라고.

하지만 에린은 침묵했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거짓말을 한다면, 아마 카론의 마음은 편해질 것이다.

그게 첫 번째 삶에서 그녀가 했던 선택이었다.

자신의 남동생이 상처받지 않도록 입을 다물자. 나만 힘들면 되는 일이니까.

내가 조용히 있으면, 나만 괴로우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에린은 이제 더 이상 카론이 진실을 아는 걸 막지 않기로 했다. 로함과의 일이 겪고 난 뒤, 깨달은 게 있었으니까.

그 순간, 카론이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누님, 무례를 용서해 줘.”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소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보이는 희미해진 상처 자국에 카론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그를 휘감았다.

아몬과 릴리아의 말이 맞았다.

카론의 두 손이 덜덜 떨려 왔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확실한 증거를 보면서도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진짜로 어머니가 누님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에린을 어린 시절부터 괴롭혔다고?

“누가…… 누가 그런 거야.”

“…….”

“대체 누가……?”

“코렐리아라고 하면 믿을 거야?”

“뭐라고?”

“네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이제껏 나를 지옥으로 떨어트렸다고 하면 믿을 거냐고.”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에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의 말에 카론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에린의 말은 그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평화로운 후작가. 바쁘지만 자상한 아버지.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상냥하고 가족을 아끼는 어머니…….

이제껏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모두 거짓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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