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46화 (46/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46화

페르딘은 그녀의 공포가 매우 어렸을 적부터 쌓여 온, 본능과도 같은 것임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에린이 그 공포를 참아 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줬다.

그리고 그때 카론이 에린을 목격했다. 그는 후작 부인에게 무어라 말한 뒤 그들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페르딘은 카론이 가까이 오자 에린을 감싸던 팔을 풀었다.

의아한 눈으로 페르딘을 바라본 카론은 이내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님, 어머니가 지금 보자고 하셔.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카론은 페르딘을 힐끔 쳐다봤다.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은 그가 에린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이번에는 제발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마.”

그 말을 들은 페르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에린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카론이 지금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말라고?’

카론은 착한 아이였다. 다만 그는 어렸을 적부터 후작 부인의 손에 길러졌다.

에린이 학대를 당하는 와중에도 카론에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건, 코렐리아의 세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모든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카론이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거란 확신이 없어서였다.

“그러지 말고 가자.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셔.”

카론의 말에 에린은 고개를 돌려 다시 후작 부인을 바라봤다.

그의 말대로 코렐리아는 멀리서 그녀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눈을 한 채로 그들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악녀인 딸의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코렐리아는 항상 그랬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상황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갈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나서는 것보다 주변인들을 이용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

“누님! 또 이럴 거야? 오랜만에 보는데 대화 한번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래.”

“그만해, 카론 경.”

카론이 에린을 재촉하자 페르딘이 그런 그를 막아섰다.

“페르딘 경이 끼어드실 일이 아닙니다. 이건 리서스 후작가의 일입니다.”

“아니, 나는 에린의 약혼자로서 네게 말한 거다.”

그 말에 카론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는 페르딘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의 약혼에 페르딘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일이지 않나.

“약혼자요?”

“그래, 약혼자.”

“누님을 사랑하지도 않으시잖습니까.”

카론의 말에 페르딘은 에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부정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남의 감정을 멋대로 판단하기 전에, 너야말로…… 에린을 생각하고 있긴 한 건가?”

“전…….”

카론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에린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에린은 금세 카론의 눈을 피하고 굳은 얼굴로 코렐리아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서 그녀가 지금 코렐리아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에린 경과 난 이만 기숙사로 가 볼 테니 후작 부인껜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줘.”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손을 단단히 잡고 카론을 지나쳤다.

* * *

카론이 정신을 차린 건, 코렐리아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붙잡았을 때였다.

그녀는 슬픈 얼굴로 에린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론…… 또 내가 에린을 화나게 했구나.”

코렐리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카론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반복되던 상황이었지만, 이번만은 다를 줄 알았다. 그동안 에린이 아카데미에서 변한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만약 지금이라면 어머니와 그녀의 사이도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에린이 언제쯤 내게 마음을 열어줄까? 난…….”

“어머니…….”

“난, 에린이 너무 걱정돼서…….”

“누님은 검술 학부에서 잘 적응하고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 어머니에게도 마음을 열 겁니다.”

“하지만 카론…… 에린을 지켜 주던 레이먼이 사라졌어.”

“네?”

코렐리아의 말에 카론은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레이먼이 후작성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없는 이상, 에린이 잘못된 길로 가도 옆에서 바른 소리를 해 줄 사람이 없잖니. 나는 그게 너무 걱정된단다.”

“누님은…… 누님은 이제 변한 거 같아요, 어머니. 아카데미에서 말썽을 피운 적도 없고, 누군가를 괴롭히지도 않아요.”

그의 말에 코렐리아는 일순 짜증 난다는 듯 카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매우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는 그 위화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카론…… 난…….”

코렐리아는 갑자기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카론의 어깨를 붙잡은 채 거의 실신할 듯 구슬프게 울었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지나가던 이들이 힐끔거리며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에린 리서스가 후작 부인을 속상하게 한 건가.”

“가여우셔라…… 이번에 아카데미에 일찍 온 이유도 에린 리서스 때문이라는 말이 있던데요.”

“그녀가 또 후작 부인에게 폭언을 퍼부은 걸지도 몰라요.”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말에 카론은 성난 표정을 지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에린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이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매달리는 코렐리아 때문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마물 토벌 때도 공녀님과 함께 다칠 뻔하지 않았니. 레이먼이 없다면, 그 애를 자제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나라도 와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서둘렀는데 또 무시를 당하니, 이 어미는 너무 슬프구나…….”

“하지만 어머니, 그런 이유라면 걱정할 게 없습니다. 누님은…… 정말로 괜찮아졌어요. 다들 누님을 좋아하고요.”

카론의 말에 코렐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뭐지? 카론 리서스가 지금 내 말을 부정한 건가?’

코렐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카론을 응시했다.

항상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던 꼬맹이는 사라지고, 대신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청년만 존재하고 있었다.

‘머리가 컸다, 이건가?’

생각이란 걸 하게 됐나 보지.

그러나 코렐리아는 그의 태도 변화를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았다. 카론 같은 타입은 무척 다루기 쉬웠으니까.

코렐리아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행동에 카론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코렐리아는 곁눈질로 그 모습을 확인하고 조소했다.

‘그럼, 카론이 변할 리 없지.’

그녀가 애처로운 손길로 카론의 손을 붙잡았다.

“카론…… 하지만, 부모에겐 자식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어…….”

“…….”

“너와 나의 사이처럼, 나는 에린을 이끌어 줘야 한단다.”

“어머니…….”

코렐리아는 카론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녀의 두 눈에 기이한 열기가 맴돌았다.

그 눈빛에 카론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코렐리아가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니 나와 에린이 둘만 만날 수 있게 도와주겠니?”

* * *

이게 옳은 행동일까? 카론은 망설여졌다. 과거의 그였다면, 코렐리아의 부탁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카론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그가 하려는 행동이 옳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누님이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확실해.’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어머니의 눈물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카론은 코렐리아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코렐리아는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음에도 에린과 카론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포기했다.

“저는 그 아이들을 잘 키우기만 하면 충분해요.”

그만큼 그녀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 아님에도 그들에게 온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런 코렐리아의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와 딸이 단둘이 만나는 걸 부탁한다는 게 더 웃긴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론은 자신의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꺼림칙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론 경, 에린 경에게 말씀을 전해 달라고요?”

카론은 눈앞의 기숙사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한 시간 뒤에…… 아카데미 앞에 있는 ‘밤의 정원’이라는 카페에서 보자고 전해 주세요.”

기숙사장, 엘루아는 그런 간단한 말을 직접 전하지 않는 카론을 수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래도…… 괜찮겠지.’

카론은 휘청거리며 아카데미의 중앙 홀로 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라도 정신을 돌릴 데가 필요했다.

이상하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마 지금쯤이면 기숙사장은 에린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했겠지.

“카론…… 걱정하지 말렴. 에린에겐 내가 잘 말해 놓을 테니까. 그 아이는 널 이해할 거야.”

“에린은 내가 부르면 나오지를 않으니까.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넌 참 착한 아들이야, 카론.”

코렐리아가 그에게 슬픈 얼굴로 속삭인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는 착한 아들이긴 해도 착한 동생은 되지 못할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