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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42화 (42/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42화

자신도 모르게 벌인 일이었다.

에린과 오늘 만나기로 했지만, 지금같이 막무가내로 그녀를 끌고 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디트리온을 만난 후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렸다.

“에린 경…… 괜찮으십니까.”

페르딘은 진작에 물었어야 하는 질문을 지금 와서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에린이 얼마나 놀랐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못 볼 꼴을 보여 준 거 같아 신경이 쓰였다.

디트리온이 했던 그 모욕적인 말들을 에린이 들었을까?

못 들었을 리가 없겠지. 소드 마스터는 청력이 좋다고 하니까.

그러나 그의 질문에 에린은 정말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디트리온 전하의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

“그리고…… 사람들이 많을 때 저를 보호하려 하지 않으셔도 돼요. 공녀님도 신경 쓰이실 테니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공녀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에린은 페르딘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아실리 공녀와 그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순간, 공녀가 누누이 페르딘과 자신의 관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공녀와 저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저 계약 연애일 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이제 끝냈고요.”

“…….”

“그러니…… 만약 그게 마음에 걸리셨던 거라면 저랑 파혼하실 필요 없습니다.”

인랑족의 영토에서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페르딘은 진심으로 그녀와 파혼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게 그의 욕심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의 곁에 있다 보면, 에린이 어떤 수모를 받을지 아는데도……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저와 파혼하겠단 말을 거둬 주세요.”

페르딘의 말에 에린은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그와 공녀님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자신을 바라보는 페르딘의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에린은 그를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를 볼 때면 심장이 빨리 뛰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가끔 어리광을 부리고 싶기도 했다.

‘저도…… 당신과 계속 함께하고 싶어요.’

에린은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페르딘과 공녀님이 아무런 사이가 아니더라도, 그의 미래에 그녀가 낄 자리는 없을 것이다.

‘욕심부리지 말자. 이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잖아.’

하지만 그의 말에 울컥하는 감정까지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매우 먼 과거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전…… 그럴 수 없어요.”

페르딘은 그녀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친절할 수 있는 거겠지.

페르딘의 옆에 있을 사람은 밝고, 상냥한 사람이어야 한다.

에린은 그 사람이 그와 닮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은 결코 페르딘의 옆에 설 수 없으리라.

에린은 그저 그만 행복하다면 만족할 수 있었다.

“에린 경, 저에게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거 압니다. 저 역시 비밀이 있으니까요. 보시다시피, 디트리온과 제 사이는 최악이죠. 그는 저를 경멸하거든요.”

“…….”

“왜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숨기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분명 사정이 있으신 거겠지요. 감히 제가 헤아릴 수 없는…….”

“저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어요. 당신이 누구보다 착한 사람이라는 걸요.”

에린의 두 눈이 떨렸다. 그녀의 두 눈에서 작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페르딘이 손을 뻗어 에린의 눈물을 닦았다. 그 손길이 애처로웠다.

“전 당신이 소문의 악행들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례가 아니라면 당신의 결백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단 한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의 말은 너무도 다정해서, 에린은 하마터면 모든 사실을 말할 뻔했다.

당신의 말이 맞다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에린은 자신도 모르게 페르딘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작게 대답했다.

“네. 원하는 대로 하세요.”

그녀의 대답에 페르딘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에린은 그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르딘이 그 배후를 정확히 밝혀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게다가 이건 과거에도 똑같이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를 막는다 한들, 똑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과거의 페르딘은 지금처럼 그녀의 결백을 밝혀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결국 진실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후작 부인의 뒤에 있는 사람, 에린이 악녀라는 소문을 낸 존재. 그자가 과연 누구였는지.

에린은 페르딘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앞에 있는 페르딘이 어쩔 줄 모르겠단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유가 뭘까요, 에린 경?”

“…….”

“당신을 보다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요. 중요한 걸 잊은 거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페르딘의 말은 마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에린의 볼을 매만졌다. 그러자 에린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페르딘은 그런 에린의 모습을 보며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울림이 퍼지는 걸 느꼈다.

‘왜 이렇게 슬픈 거지?’

페르딘은 혼란스러웠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 * *

“디트리온 전하.”

디트리온은 자신의 눈앞에 무릎을 꿇은 로함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그런 디트리온의 행동에 로함은 인상을 쓰면서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로함 경. 대체 경은 상급 기사이면서 잘하는 게 뭐지?”

“크…… 윽. 죄송합니다, 전하.”

“편지 한 통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기사를 어디 써먹을 데가 있겠나?”

디트리온을 호위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은 그 광경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항상 있던 일이라는 듯, 오히려 디트리온의 행동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가 하는 짓은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그가 제국의 1황자이자 로함의 주군이라 해도 상급 기사에게 할 대우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디트리온이 로함에게 하는 행동은 마치 기사가 아닌, 노예를 대하는 것 같았다.

“로함 경, 정말 실망이야.”

그렇게 말한 디트리온이 로함의 볼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로함은 공포에 질린 채 그런 디트리온을 응시했다.

“필요가 없어진 건 폐기 처분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디트리온의 표정은 지독할 정도로 무감정했다.

눈앞의 기사가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것과는 별개로, 디트리온이 이곳에 온 이유 역시 그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공식적으로 그는 ‘큰 업적을 세운 페르딘의 포상’을 위해 이곳에 왔으니까.

그리고 그에게 포상을 내리기 위해 이 주 뒤 아카데미에서 작은 연회가 열릴 것이다.

‘코렐리아가 도착하는 것도 그때쯤이겠지.’

디트리온은 코렐리아를 떠올리며, 에린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갔다.

코렐리아를 보고 나서도 에린이 그대로일지 궁금해졌다. 셋이 함께 있으면 코렐리아에게 끌려 나가던 그때처럼, 그를 보면서 살려 달라는 듯 애원할까?

아니면 오늘처럼 완전히 달라진 눈으로 그를 볼까?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전하!”

“살려 달라고?”

디트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쓸모를 입증해야지, 로함 경.”

그는 로함에게 벌을 주는 와중에도 계속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던 에린의 녹색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순 자신의 생각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느낌에 디트리온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로함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 쓰레기를 이용해 그녀를 상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디트리온은 무표정한 에린의 얼굴이 다시 예전처럼 울상으로 변하는 걸 보고 싶었다.

디트리온이 로함을 향해 말했다.

“살고 싶나, 로함 경? 내가 방법을 말해 주지.”

* * *

에린은 페르딘과 함께 있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페르딘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붙들었다.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상해.’

에린은 멍하니 그런 페르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페르딘의 얼굴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페르딘을 피하진 않았다.

그는 그런 에린을 정말로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

그가 그녀를 향해 무어라 말하는 게 보였다.

‘이건 꿈일 거야.’

에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건 슬픔 때문이 아니라 너무 행복해서 나오는 눈물이란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꿈속의 자신은 과거에 항상 짓던 슬픈 표정이 아닌, 미소를 띠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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