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41화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디트리온이 기억하는 페르딘은 항상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이게 ‘운’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일일까?
마물 토벌 때도, 그리고 이번 난민 구출 임무 때도 페르딘은 기이하게 모든 일을 해냈다.
그가 받은 임무들이 상식적으로 해결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에도.
디트리온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러운 버러지 자식이.’
이번 임무를 성공해 낸 페르딘의 입지가 또 넓어졌다. 그리고 그건 디트리온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에린에게 그가 하는 일은 단순한 화풀이였다. 말도 안 되는 임무를 수행해 낸 페르딘을 향한 화풀이.
‘에린 리서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디트리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확실히 예전과 달리 눈에 띌 정도로 당당해진 에린 리서스가 보였다.
코렐리아에게 매를 맞던 초라한 여자아이는 디트리온이 놀랄 정도로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페르딘이 왜 그녀를 아끼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그와 에린이 약혼을 한다고 했을 때, 디트리온은 그 사실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 아버지가 변덕을 부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더러운 피를 이은 페르딘과 한심한 에린 리서스.
‘잘 어울리는 짝이군.’
그렇게 생각을 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달라진 에린을 보고 나자 디트리온은 심기가 비틀리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바뀐 그녀의 모습이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다.
“페르딘과 약혼을 해서 그런가…… 눈빛이 그 녀석과 많이 비슷해졌네.”
“…….”
“재밌네. 혹시 페르딘과 파혼하고 내게 올 생각은 없어?”
물론 전혀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그는 에린과 약혼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거부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에린이 얼마나 정에 굶주려 있는지 알고 있으니 던져 본 말이었다.
아마 어쩔 줄 몰라 하겠지.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도 힘들어했었으니까.
“죄송해요, 전하.”
더럽다는 자신의 말에 울상을 지으며 손을 꼼지락거린 게 전부였던 소녀다.
하지만 그런 디트리온의 생각을 비웃듯 에린은 아직도 그에게 잡혀 있는 팔목을 빼냈다.
웃고 있던 디트리온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그는 에린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만큼 손에 최대한 힘을 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에린은 아이의 손을 떼어 내듯, 여유롭게 그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디트리온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에린의 팔목이 빠져나간 손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디트리온 전하.”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디트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에린이 보였다.
“제가 페르딘 전하와 파혼해도 전하께 갈 일은 없을 겁니다.”
말을 내뱉는 에린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하하.”
디트리온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그는 눈에 눈물이 맺힐 때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에린이 인상을 쓰며 그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디트리온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페르딘과 약혼을 했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것 같아? 페르딘은 오히려 너와의 약혼을 끔찍하게 생각할 텐데 말이야.”
“…….”
“생각해 보니 조금 안타깝긴 하군. 그 약혼으로 인해 페르딘의 가치가 더 떨어졌으니까.”
“…….”
“넌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코렐리아가 그렇게 가르쳤잖아. 설마 까먹은 거야?”
디트리온은 에린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피하려면 피해 봐. 그게 어떻게 돌아오는지 보자고.”
에린에게 그의 손이 닿기 직전, 누군가가 디트리온의 손을 붙잡았다.
감히 누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의 손을 붙잡기도 전에 숨어 있던 기사들에 의해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디트리온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린 채, 자신을 붙잡은 남자를 바라봤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재수 없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디트리온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디트리온이 남자를 보며 짓씹듯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페르딘 렉시아……!”
페르딘이 그곳에 있었다.
* * *
에린은 페르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디트리온의 도발에 넘어갈 뻔했다. 그러면 지금까지 했던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었을 거다.
페르딘은 디트리온과 에린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인랑족 토벌 때 다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상태로 뛰었기 때문인지, 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거 놔.”
디트리온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페르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오랜만이네, 페르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등 뒤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어느새 나타난 기사가 디트리온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페르딘의 뒤에 있던 아몬은 그 기사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는 기사가 그곳에 있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그 기사가 아직 아몬이 상대하기엔 터무니없이 강한 존재라는 걸 뜻했다.
제국의 1황자인 디트리온의 기사단은 그만큼 강했다.
아카데미 학생으로 이루어진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은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아몬은 디트리온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정말 악취미군.’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디트리온은 분명 에린을 평범한 아카데미 검술 학부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상급 기사와 붙어 보란 명령을 내렸다니…….
에린의 체면 따위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게 너무 잘 보이는 행태였다.
디트리온은 페르딘이 잡았던 팔 부분을 손수건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마치 더러운 것을 닦아 내는 듯한 행동에 아몬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에린 경에게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 제국의 황자로서 뛰어난 아카데미 학생의 실력을 직접 보고 싶어서 말이야.”
“에린 경은 저와 선약이 있습니다.”
페르딘의 말에 디트리온은 주변을 살폈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흥미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지금은 한 수 접어줘야만 했다.
페르딘이 난민들을 구해 낸 이후 그의 평판이 너무 좋아진 상태였다. 이곳에서 그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리라.
디트리온의 시선이 에린을 향했다. 그를 무감정한 눈으로 쳐다보던 에린이 페르딘을 보자마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보다 저 버러지를 더 신경 쓴다고?’
그게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에린은 그의 체스판 위에 올라온 말에 지나지 않았다. 페르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연놈이 어떤 짓을 하든, 원래는 가소롭게 느껴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에린의 행동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신경 쓰였다.
페르딘은 에린을 그의 등 뒤에 숨긴 채 디트리온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그에 디트리온은 걸음을 옮겨 페르딘의 옆에 섰다. 그는 에린을 바라보며 페르딘의 귓가에 속삭였다.
“요즘 에린 리서스를 아낀다고 말이 많더구나, 페르딘.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
“알고 있잖아. 네가 무언가를 아끼게 되면 그 결과가 어땠는지……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그에 페르딘이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그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디트리온의 말에 페르딘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됐다. 자신을 향한 모욕은 상관없지만, 그의 주변인들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원래는 흥미가 없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그녀를 건드리면, 저도 참지 않을 겁니다.”
“그것참 재밌겠네. 내기할까? 우리 둘 중에 누가 에린 리서스를 차지할지.”
디트리온의 시선은 줄곧 에린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정말로 에린 리서스가 검의 선택을 받았던 걸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완전히 달라진 그녀를 보니 그의 아버지가 왜 리서스 후작가를 견제하려 했는지 이해가 갔다.
왜 검의 선택을 받은 자를 찾아내, 그 재능을 꺾고 죽이려 했는지도.
디트리온의 두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 * *
괜찮다. 에린은 소드 마스터다.
페르딘은 그 생각을 되뇌면서 에린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디트리온이 아무리 그녀를 핍박하려고 해도 감히 소드 마스터를 이길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황제에겐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레옹 백작과 에르만 후작.
‘만약 그들이 에린을 협공한다면?’
페르딘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그의 상상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리서스 후작가의 영애를 디트리온이 함부로 건드리려 할까? 하지만 그전에 리서스 후작가는 그녀의 편이 맞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페르딘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페르딘 경.”
페르딘은 에린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어느새 그녀를 이끌고 자신의 집무실까지 와 버린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