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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39화 (39/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9화

‘대체 뭐지?’

자신이 뿜어낸 것이 아닌 또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는 엘루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앞에 있는 에린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일반인에게 함부로 기세를 뿜어내다니, 참 대단하군요.”

에린의 말에 로함이 못 참겠다는 듯 발검을 하려 했다. 그건 오히려 에린이 바라는 바였다. 그녀는 로함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곳은 좁으니 밖으로 따라 나오시죠.”

그렇게 말한 에린은 곧장 기숙사 밖으로 향했다. 로함이 씩씩거리며 뒤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에린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남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싶은가 보군!”

로함이 누구였는지 생각하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어차피 저자는 미래에 기사직을 잃는 인간이었지.’

미래, 그러니까 에린의 과거에 디트리온이 페르딘에게 시비를 걸며 결투를 신청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기사들인 아몬과 로함이 서로 맞붙었다.

결투에서 아몬이 승리하자 로함은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어깨를 칼로 찔렀다.

그 일로 기사직을 박탈당한 인간이었다. 에린은 그 이후로 로함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자존심이 강한 디트리온에게 폐기 처분 되었겠지.

디트리온은 페르딘의 기사에게 패배한 로함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했을 테니 말이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에린이 원하는 바였다.

디트리온을 상대하는 데 있어선 사람들의 시선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는 평판을 굉장히 신경 쓰는 황자였으니까.

“에린 리서스!”

로함은 괴성을 지르며 검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검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누군가가 로함의 손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나왔군.’

에린은 시선을 돌려, 로함을 붙잡은 사람을 바라봤다.

어깨까지 오는 은발에 페르딘과 닮은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로함이 순종적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에린과 엘루아에게 소리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렉시아 제국의 1황자, 디트리온.

차기 황제로 유력한 남자이자, 페르딘의 평생의 숙적이었다.

“에린, 우리 너무 오랜만이지? 로함 경의 무례는 사과하지. 겨우 편지 한 통을 전달하는 일이라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어.”

그녀는 디트리온의 말에 설핏 웃었다.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에린은 디트리온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로함에게 시켜 그녀에게 편지를 가져다주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겠지.

디트리온은 에린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디트리온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아한 그의 생김새와 그 화사한 웃음이 매우 잘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에린,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들었는데…….”

“…….”

“페르딘과 함께 난민들을 구출해 냈다며. 이제 막 검을 잡은 네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디트리온의 말대로였다.

에린이 인랑족의 족장을 물리친 후, 아몬과 릴리아가 잡혀 있던 난민들을 이끌고 인랑족의 영토에서 탈출했다.

자신들의 족장이 죽은 모습을 본 인랑족들은 감히 그들에게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페르딘의 이번 토벌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이는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일이었다.

“그게…… 마물 토벌 때 나타났던 소드 마스터가 다시 등장해서 가능했다고 하더군.”

“운이 좋았죠.”

“그래, 운이 좋아도 지나치게 좋았지.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정체가 누군지도 모르는 소드 마스터가 계속 등장하는 게 말이야. 말이 안 되잖아? 마치…….”

디트리온은 에린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말을 했다.

몇 달 전의 그녀였다면 고통스러워했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내 눈앞에 있는 후작가의 영애처럼 말이지. 분명 한 번도 검을 휘둘러 본 적 없던 평범한 레이디가…… 이제는 손에 굳은살이 생기고, 초급반의 상위 다섯 명 안에 들다니.”

“…….”

“이것도 운이 좋은 건가, 에린 경?”

디트리온 렉시아.

에린은 첫 번째 삶에서부터 그가 싫었다. 디트리온은 그녀가 후작 부인에게 학대당한다는 걸 아는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에린은 어렸을 적, 그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디트리온은 후작 부인의 손을 잡고 후작성에 방문했다.

그날 후작 부인이 지었던 친절한 미소는 카론에게 지어 주는 웃음과는 다른 것이었다.

“에린, 이리 와서 인사해. 차기 황제가 되실 분이니까.”

후작 부인의 말에 그는 방금처럼 에린에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동화 속에 나오는 황자님 같아 조금 설레기도 했다. 낮은 웃음소리를 가진 그는 초라한 자신과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그런 디트리온을 보며 에린은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그만큼 디트리온의 모습은 겉으로는 완벽해 보였으니까.

아름답고, 냉철한 황자님. 그게 세간에 알려진 디트리온의 모습이었다.

에린은 디트리온을 볼 때마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동경이 담긴 눈으로 디트리온을 힐끔힐끔 바라보고는 했다.

‘황자님은 반짝반짝 빛이 나.’

에린은 디트리온을 멋진 황자님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후작 부인의 훈육 시간을 들키기 전까지는…….

벌 받는 게 무서워 도와달라 소리치는 그녀를 디트리온은 비웃으며 방관했다.

그때 그가 했던 말을, 에린은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했다.

“더러워.”

에린은 디트리온의 손을 뿌리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디트리온이 잡은 팔에 벌레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소름 돋는 감각이 느껴졌다.

“제가 검술 학부에서 상위권에 든 건 운이 아니라 실력입니다, 전하.”

“실력?”

에린은 자신의 손을 털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한 행동에 디트리온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예전과 달리 반항하는 에린의 모습이 오히려 그의 흥미를 유발했다.

‘에린 리서스가 저런 식으로 굴 수도 있었나? 변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군.’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제 뜻을 거스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재밌네. 그 실력…… 내게 보여 줄 수도 있겠나? 나는 실력이 뛰어난 자를 매우 좋아해서 말이야. 혹시 모르잖아? 우리 기사단에 에린 경을 데려가고 싶을지도.”

“아쉽게도,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이라고?”

“네, 페르딘 경을 뵈러 가야 해서 그건 불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섭섭한데. 페르딘보다 내가 경과 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우리 이래 봬도 어렸을 적부터 봐 왔던 사이잖아?”

“원하시는 게 뭐죠?”

“페르딘을 만나러 가지 말고, 내가 시킨 일을 해. 네 검술을 보이란 말이야, 에린 리서스.”

“…….”

“이건 부탁이 아니야. 명령이지.”

디트리온은 에린에게 고압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자신에게 더럽다고 말하던 그때와 닮아 있었다.

이제야 디트리온다웠다.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팔목을 붙잡은 채 강하게 힘을 줬다.

* * *

아카데미의 중앙 홀.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회의실에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원이 전부 모여 있었다.

카론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데렉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에린 리서스가 다친 걸 안 후부터, 카론은 계속 저 상태였다.

그녀에게서 떨어져 있으면 에린이 죽기라도 한다는 듯이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쟤도 정상은 아니야.’

데렉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카론의 심정은 그도 이해가 갔다.

그 역시 페르딘이 다쳤을 때 카론과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데렉과 카론은 페르딘이 인랑족의 영토에 들어가자 곧바로 뒤따라갔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페르딘과 에린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 길을 헤매고 나서야, 그들은 난민들을 이끌고 영토 밖으로 향하는 아몬과 릴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에린과 페르딘도.

데렉과 카론은 각자 비명을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카론은 그 이후로 에린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직접 밥을 떠먹여 줄 땐, 옆에 있던 아실리 공녀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데렉은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 페르딘에게 물었다.

“페르딘, 이건 말이 안 돼. 너 그 소드 마스터랑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

“…….”

“마물 토벌, 그리고 이번에 인랑족 토벌까지…… 한 번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어도 두 번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어. 인랑족의 족장이 갑자기 죽어 있었다고? 황제가 그 보고를 순순히 믿으려고 할까? 너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데렉이 아몬과 릴리아를 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아몬과 릴리아는 데렉의 말에 동의하는 대신 그의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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