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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38화 (38/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8화

* * *

토벌대가 아카데미에 돌아왔다.

에린은 자신의 방 침대 위에 누워 그동안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릴리아에게 세 번의 삶을 경험했다는 얘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실을 말했다.

에린의 말을 들은 릴리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눈물을 흘렸다.

“미안, 미안해…….”

뭐가 미안한지, 릴리아는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에린의 말에 릴리아는 칼립스가 죽고 나서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말해 줬다.

그가 죽고 찾아온 샬롯이라는 하녀, 그리고 그녀가 어렵게 얻은 것이라며 내밀었던 마나석.

친우의 복수를 해 주면 마나석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까지.

샬롯은 언제나처럼 칼립스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릴리아를 부추겼고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까지 내걸었다.

일반적으로 마나석은 황실에서 관리하고 있고,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만 소유할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가 득세한 세상에서 황권이 어느 정도 건재할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후작가의 하녀가 마나석을 가지고 있다고? 릴리아는 자신이 왜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자연스럽게 그 말을 믿게 됐다고 말했다.

“마치…… 무슨 마법에 걸린 듯,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릴리아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에린은 그녀가 강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먼이 에린에게 했던 짓을, 샬롯이 릴리아에게 똑같이 행한 것이다.

‘샬롯은 후작 부인이 가장 아끼는 하녀였어.’

얼핏 과거에 후작 부인 옆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하녀가 기억났다.

그녀가 죽는 그 순간에도, 샬롯은 그림자처럼 후작 부인의 옆에 붙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당시의 에린은 이상함을 느껴도 그걸 알아볼 힘이 없었다.

그녀 또한 하녀가 혼자서 마나석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릴리아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봤던 마나석은 평범한 마나석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금지된…… 흑마법을 이용한 마나석이라고 했다.

인랑족 족장의 시체가 부서진 것을 단서로 릴리아는 아카데미의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고, 그게 흑마법 때문임을 확신하게 됐다고.

에린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도대체 왜?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항상 궁금하던 일이었다. 에린이 후작 부인에게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코렐리아는 왜 자신을 나락으로 빠트린 걸까. 에린은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조만간 바빠질 수도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에린은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인상을 썼다.

누군가가 그녀의 기숙사 방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은 둘. 한 명은 숙련된 기사고, 또 다른 한 명은 기숙사를 관리하는 기숙사장인 것 같았다.

기숙사장이 안절부절못하며 따라오는 기색이 발걸음에서도 느껴졌다.

“에린 리서스 양!”

에린은 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토벌대가 아카데미에 도착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았다. 다들 토벌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무례한 일인 것이다.

에린은 밖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낯익다는 생각을 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에린 양! 급보입니다!”

“로함 경, 에린 경은 토벌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감히 하녀 주제에 내 말에 토를 다는 건가?”

“저는 하녀가 아닙니다!”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문을 열자 그녀의 예상대로, 문 앞에는 기사 한 명과 기숙사의 총책임자인 기숙사장, 엘루아가 있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기사는 에린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 기사가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 이런 인간도 있었지.’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1황자 디트리온의 기사였다. 이름이 로함이었나.

디트리온의 옆에서 항상 그녀를 재수 없게 바라보던 게 기억났다.

“에린 양, 오랜만에 뵙는군요.”

로함의 말에 옆에 있는 엘루아가 놀란 얼굴을 하는 게 보였다.

에린은 기사였다. 아텐츠 아카데미의 검술 학부에 온 이상, 그녀는 더 이상 후작가의 영애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에린 양’이라는 호칭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죠?”

“디트리온 전하의 명으로 코렐리아 님께서 보내신 급보를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로함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에린에게 건넸다.

그 위에 코렐리아의 필체로 쓰인 그녀의 이름이 보였다.

에린은 로함의 손에서 후작 부인의 편지를 받았다.

[에린, 오랜만이구나. 레이먼이 후작가에 왔냐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는 후작가에 도착하지 않아서 말이야. 레이먼이 멋대로 토벌대에서 이탈했다는 건 말이 되질 않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구나. 그의 일을 알아볼 겸, 아텐츠 아카데미에 있는 네가 걱정돼서 조만간 들를 생각이란다.

어차피 곧 페르딘 전하의 승전 연회가 열리니 그때 맞춰 도착할 듯해. 디트리온 전하께서는 먼저 출발하신다고 하니 네가 이 편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도착하실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조만간 보자꾸나.

너를 사랑하는 코렐리아가.]

에린은 문가에 기대 편지를 읽은 후, 한참 동안 코렐리아가 쓴 문장을 곱씹었다.

너를 사랑하는 코렐리아가.

코렐리아는, 남들이 있을 때 에린에게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했다.

“사랑한단다, 에린.”

에린은 그녀가 주는 아픔에도 그 말이 사실인 줄 알았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서 하는 일인 줄 알았다.

그래서 후작 부인의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죽기 전, 그녀가 모든 진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랬다.

‘진짜로 사랑한다면,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도 않았을 텐데, 참 바보 같았지.’

지금 코렐리아가 이 편지를 보낸 목적도 뻔했다. 이런 사소한 내용을 급보로 보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건 단지 코렐리아가 에린에게 종종 치고는 했던, 질 나쁜 장난이었다.

아텐츠 아카데미에 자신의 방문 사실을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급보를 받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자신을 생각하며 웃기 위해서겠지.

첫 번째 삶에서도 코렐리아는 종종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주로 그녀가 ‘잘못했을 때’ 하던 행동이었다.

코렐리아는 급보를 받고 떨고 있을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후작 부인은 디트리온을 보려고 자주 황성에 들렀지.’

코렐리아는 렉시아 제국의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고, 황제의 친인척이란 사실 하나만으로 꽤나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대 황제가 될 황자들을 교육하기도 했으니 디트리온과 코렐리아가 친밀한 관계인 건 이상할 게 없었다.

에린은 조소하며 코렐리아가 보낸 편지를 성의 없이 구겼다.

그녀의 행동에 앞에 있던 로함이 놀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에린이 한 행동이 너무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디트리온을 따라서 자주 후작가에 갔었고, 때문에 에린이 그 엄청난 소문과는 달리 소심한 성격이라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에린 리서스가 코렐리아의 편지를 구긴다고? 그녀는 코렐리아를 신처럼 떠받들지 않았나?

“로함 경.”

“에린 양?”

로함의 말에 에린은 미소를 지었다. 내상이 심하지만, 이런 머저리를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주먹이 빠르게 로함의 얼굴로 향했다.

상급 기사인 그가 당장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 주먹이 로함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에린이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그녀의 주먹에 맞았으리라.

“이……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로함이 기겁하며 외쳤다.

그는 에린 리서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다짜고짜 사람에게 주먹질을 하다니!

“경은 기사라는 사람이 한낱 레이디의 주먹도 피하지 못하는군요. 디트리온 전하의 호위로는 실격이신 거 같습니다.”

로함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이…… 이 무례한! 후작가의 영애가 예의도 없소!”

에린은 그의 외침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무례한 건 경입니다. 저는 리서스 후작가의 영애이기 전에 기사입니다. 그런데 경은 기사가 되어서 기본적인 호칭부터 실수하시다니…… 할 말이 없군요.”

풉!

에린의 말에 옆에 있던 엘루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화가 난 로함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봤다.

“천한 게 감히 웃어?”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 듯한 기세였다. 당황한 엘루아가 뒷걸음질 쳤지만 얼마 못 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일반인이 감당하기 힘든 기세로 엘루아를 압박하며 로함은 씩 웃었다. 그러나 곧 그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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