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7화
릴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페르딘을 살피고 있던 아몬이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릴리아! 괜찮아?”
릴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난, 난…… 에린 리서스…… 난 네가…….”
네가 칼립스를 죽였다고 생각했어.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살아왔어.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릴리아의 온몸이 떨려 왔다.
그녀는 지금까지 에린이 칼립스를 죽였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어야만 살 수 있었기에…… 믿었다.
그렇다면, 에린 리서스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모든 사람에게 비난을 받은 그녀는? 릴리아는 현기증이 이는 걸 느꼈다.
이제야 알게 된 끔찍한 진실이 그녀를 수렁으로 끌어당겼다.
“미안, 미안해…… 나는…….”
하지만 릴리아의 말은 에린에게 닿지 못했다.
그녀는 누적된 피로로 인해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 * *
소드 마스터가 돼서 형편없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낯선 천장에 에린은 조소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썼다. 인랑족의 족장을 상대하는 방법이 다소 무식했다는 걸 에린도 인정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상대하기엔, 인랑족의 족장이 너무 강했다.
그렇다고 온 힘을 드러내고 싸우기엔 페르딘과 그의 사람들이 다칠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페르딘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으니 빠르게 해결을 한 뒤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래서 에린은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녀도 이렇게까지 다치는 일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인랑족의 족장이 폭주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린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페르딘의 모습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가 왜 내 옆에 있는 거지?’
심지어 페르딘은 그녀의 오른쪽 손을 붙잡고 있었다. 에린은 놀란 얼굴로 손을 빼려다가, 페르딘이 깨어날 것 같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온몸을 뻣뻣하게 굳힌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린 리서스? 깨어난 거야?”
에린은 문을 열고 들어온 의외의 인물에게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릴리아가 그녀를 바라보며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릴리아가 나를 걱정한다고?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에린은 왼쪽 손으로 자신의 팔을 꼬집었다. 순식간에 팔 부분이 벌게지며 아픔이 몰려왔다.
그 모습을 본 릴리아가 경악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대체 너는…… 왜 그러는 거야? 몸을 좀 아껴.”
릴리아는 에린의 팔을 붙잡고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이게 치유 마법을 사용할 만한 일은 아니었는데?
에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상냥해진 릴리아가 이상해서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그녀는 잠시 숨을 참았다.
“페르딘, 일어나. 나 에린 리서스랑 둘이서 할 말이 있어.”
“릴리아?”
에린은 갑작스럽게 페르딘을 깨우는 릴리아의 모습에 놀라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감겨 있던 페르딘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는 멍한 눈으로 가만히 에린을 바라봤다.
그 선명한 푸른빛 눈동자에 에린은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직도 꿈을 꾸나?”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의 손에 볼을 기댔다.
페르딘의 볼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에린의 손등에 맴돌았다.
에린의 볼이 잘 읽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릴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페르딘 렉시아 전하, 꿈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서 나가 주시겠어요? 제가 에린 경과 긴히 할 얘기가 있거든요.”
릴리아의 말을 들은 페르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가, 다시 에린에게 돌아갔다.
한참을 그 자세로 있던 페르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에린에게 말을 꺼냈다.
“에린 경…… 미안합니다. 제가 잠시 착각을 했습니다.”
아실리 공녀님과 착각을 했다는 걸까? 에린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그렇게 다정하게 군 것이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빼냈다.
에린은 아실리 공녀가 알면 상처받을 만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페르딘의 시선이 에린의 손을 따라갔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묻는 페르딘의 얼굴은 어딘가 수척해 보였다.
몸이 괜찮냐는 말은 오히려 그녀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에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웃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계속 기다려도 깨지 않으셔서 정말…… 걱정했습니다.”
“…….”
“에린 경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요?”
“네. 아카데미에 가면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나요? 그곳에서 대화하고 싶습니다.”
에린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정체에 대해 추궁하려는 걸까? 페르딘이 아무리 관대하다 해도 힘을 숨긴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 넘어갈 순 없을 것이다.
분명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숨긴 그녀를 의아하게 생각하리라.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두 분이서 대화 나누세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서는 페르딘의 귓가가 붉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딘도 아직 상처가 다 낫진 않은 것 같지만 그녀의 생각보단 내상이 심하지 않은 듯했다.
아마 아실리 공녀를 만나면 어렵지 않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린.”
에린은 릴리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침대 옆, 페르딘이 있던 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린 리서스가 아니라 에린이라고?’
에린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릴리아는 그녀를 부를 때마다 무조건 성을 붙여서 부르고는 했다. 마치 그것이 그들 사이의 거리감을 견고히 해 준다는 듯이.
짝.
릴리아가 손뼉을 침과 동시에 에린은 방 안에 결계가 쳐졌다는 걸 눈치챘다.
아마 방음 마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릴리아는 마법이 잘 사용된 걸 확인하더니 작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
“미안해, 에린 리서스.”
“갑자기…… 갑자기 왜요?”
에린은 떨리는 손을 제 뒤로 감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릴리아가 왜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한단 말인가?
“네 옷을 갈아입힌 건 나야.”
“…….”
“네 상처를 봤어. 페르딘과 아몬 녀석도 어느 정도 눈치챈 거 같던데…… 그 녀석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 네가 말하기 싫어해서 비밀로 해 주고 있다는 것도…….”
“그건…….”
에린은 항상 진실을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졌었다.
‘에린, 너를 믿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순간, 레이먼이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미 죽은 그의 망령이 그녀의 어깨에 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릴리아에게 진실을 말해 봤자 그녀가 널 믿을 거 같아? 웃기지 말라지.’
‘네가 살인자란 것도 사실이잖아? 솔직히 칼립스를 죽인 건 너나 다름없어.’
‘그러니 입을 다물어. 넌 그게 어울리니까.’
닥쳐, 레이먼.
에린은 자신이 입을 열려 했을 때마다 벌어졌던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과거를 떠올린 에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자 릴리아가 간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싶어. 난 칼립스의 죽음을 알아야만 해. 네가 그를 죽인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죽인 건지.”
진실을 말할 때마다 사람들 대부분이 에린을 비난했다. 그리고 몇몇, 그녀를 믿어 줬던 이들은 죽어 버렸다.
에린은 그 뒤부터 진실을 말하는 게 두려워졌다. 자신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 죽어 버릴까 봐.
그녀의 곁에서 사라질까 봐.
그때 릴리아가 머뭇거리는 에린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두 번의 환생을 거쳐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두렵고 무서웠다. 그녀가 말을 하면, 벌어질 일들이…….
릴리아는 에린의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할 처지가 아닌 거 알아.”
“…….”
“난…… 타인의 말만 믿고 너를 증오했어. 그게 너에게 어떤 상처가 됐을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어.”
릴리아의 말에 에린은 두 눈을 감았다.
원래라면, 그녀는 계획한 모든 일을 제대로 끝낼 때까지 누구에게도 과거의 일을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릴리아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었다. 에린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가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일 거예요.”
에린은 천천히 자신의 삶을 말하기 시작했다.
악녀 에린 리서스가 아닌, 불쌍하고 소심한 후작가의 영애 에린 리서스의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