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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36화 (36/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6화

* * *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있었다. 특히 코렐리아와 샬롯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

인랑족의 영토. 그곳에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아실리 공작이 페르딘에게 농담처럼 건넨 말은 사실이 되었다.

“혹시 모르지 않나. 이번에도 지나가던 소드 마스터가 도와줄지.”

한편 세 번의 삶을 거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에린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의 앞에 나타난 자를 바라봤다.

릴리아에게 창을 던진 존재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랑족의 족장이었다.

두 눈은 이지를 잃었고, 온몸엔 절제하지 못한 마나가 넘실거리는 상태였다.

절대로 정상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건 에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 잠깐 긴장을 늦춘 새에 다쳤다.

다행히 릴리아를 대신해 창에 맞은 페르딘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 창이 박히기 직전, 그들이 구한 아이가 마나를 일으켜 순간적으로 창의 속도를 늦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가 던진 창이었다. 아무리 느려졌어도 페르딘에게 내상을 입히기엔 충분했다.

아몬은 비명을 지르며 페르딘에게 달려갔고, 릴리아는 그 옆에서 끊임없이 회복 마법을 펼쳤다.

에린은 그 모습을 보며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죽을 상처는 아니야. 알고 있잖아, 에린 리서스. 그러니 진정하자.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 다독여 봐도 분노로 인해 손이 떨려 왔다.

에린은 수많은 죽음을 봐 왔고, 그녀 또한 직접 죽음을 겪어 보았다.

페르딘은 내상을 입긴 했지만 상처가 깊지 않으니 몇 달 정도 요양하면 충분히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다치는 순간 에린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황제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난 페르딘. 그리고 차가운 후작성에서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그녀.

마침내 소식을 들고 도착한 전령과 그것을 전해 듣고 충격에 빠진 아몬의 얼굴.

그때 그녀가 비명을 내지르며 느꼈던 무력감까지…….

에린은 자신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눈앞에 족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누구야?”

에린의 두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사실 그녀는 그동안 약간이지만 희망을 품었었다.

이대로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냥 이렇게…… 과거는 잊고 평화롭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텐츠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과거와 달라졌다.

그곳에서 검술 학부 학생들과 함께 검술을 연마하며 웃고 떠드는 생활은 퍽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행복했다.

이대로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그녀가 과거에 코렐리아에게 당한 일들을 전부 잊어도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하지만 알잖아, 에린.’

에린은 누군가가 자신을 수렁으로 끌고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후작가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이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한 이상……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지 않는 이상, 미래는 또 똑같이 흘러갈 거였다.

페르딘은 과거 이곳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 에린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또 다치게 됐다.

다친 부위는 달라졌지만…… 그가 부상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에린은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좋잖아. 날…….”

왜 날 화나게 해?

크아아아악!

인랑족의 족장이 괴성을 지르며 에린에게 달려들었다.

그 살벌한 기세에 아몬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린에게 외쳤다.

“에린, 위험해!”

족장의 상태가 이상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흑마법에 오염된 기사들이 바로 저러할까?

안 그래도 소드 마스터에 육박한다고 알려진 인랑족의 족장의 힘은, 감히 그가 측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족장의 두 눈은 뒤집힌 상태였고 그 주위엔 마나가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몬은 이곳에 숙련된 소드 마스터가 있었어도 상대하기 꽤 벅찼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에린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저건 이길 수 없으리라.

그 순간, 인랑족 족장의 손톱이 그녀의 옆구리에 박혔다.

그 힘이 그대로 에린의 몸을 뒤흔들었다.

아몬이 눈으로 따라잡지 못했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옆에 있던 릴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에린의 옷이 잘려 나가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인랑족의 족장은 그런 그녀에게 다시 자신의 손톱을 이용해 공격하려고 했다.

눈앞에 있는 인간 여자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몸에 박힌 족장의 손을 에린이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몬은 그녀가 일부러 그의 공격에 당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인랑족 족장의 팔에 핏줄이 불거졌다. 그러나 에린의 작은 손에 붙잡힌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닌 최대한의 마나를 운용해 그를 붙든 그녀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녀의 검 끝에 시퍼런 마나가 맺혀 있었다.

에린은 그 검을 그대로 족장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 * *

릴리아의 손이 옅게 떨렸다.

에린 리서스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쉴 새 없이 펼친 치유 마법에 그녀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미쳤어…….”

에린 리서스는 미쳤다고.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지? 진짜 제정신이 맞는 거냐고!

저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녀는 페르딘보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릴리아는 페르딘을 치유하면서 안 그래도 마나가 바닥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정신없이 에린에게 치유 마법을 쏟아부었다. 그러면서 순간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녀가 여기서 멈춘다면, 힘을 들이지 않고 에린 리서스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샬롯이 누누이 말했던 복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에린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건…… 페르딘이 한 말이 그녀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에린 리서스가…… 그녀가 굳게 믿고 있던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면…….

릴리아는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른 것같이 숨이 막혀 왔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누군가가 붙들었다. 릴리아는 멍하니 자신의 손목을 붙든 사람을 바라봤다.

에린 리서스가 눈을 반쯤 뜬 채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너 이게 무슨…….”

“저 말고…… 페르딘 경에게…….”

“그게 무슨 개소리야…… 페르딘은 너만큼 다치지 않았어! 이미 치유 마법으로 안정화됐다고! 당장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더 없단 말이야.”

“전……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거야!”

에린 리서스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희생하는가.

릴리아는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무리하면서까지 인랑족의 족장을 한 번에 죽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족장을 붙들지 않았다면, 소드 마스터와 그에 버금가는 실력자의 싸움에 주위에 모든 이들이 크게 다쳤을 게 분명했다.

릴리아도 알고 있었다. 에린이 이 꼴이 된 건 순전히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하지만 말도 안 되잖아. 그렇게 착한 사람이라면, 왜 칼립스를…….’

그렇게 생각하던 릴리아의 눈에 족장의 목에 걸려 있는 검은빛이 도는 구슬이 보였다.

“저게…… 저게 왜 여기에……?”

그건, 샬롯이 그녀에게 보여 줬던 특이한 마나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찾아와 늘 복수할 수 있다며 속삭이던 샬롯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칼립스가 죽은 후, 자신의 옆에 있어 준 사람은 샬롯밖에 없었다.

릴리아는 칼립스의 절친한 친구였다고 말하는 샬롯을 볼 때마다 오빠를 떠올렸다.

그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샬롯에 대한 의심을 떨쳐 내려고 노력했다.

‘나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해도, 칼립스가 떠난 이상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하나부터 끝까지 의심스러운 일들뿐이었다.

칼립스를 죽인 이가 에린 리서스라고?

그 당시 저와 비슷한 나이의 어린아이가?

모든 단서가 하나둘 합쳐지자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탁한 안개가 걷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왜 그렇게 쉽게 믿었지?’

릴리아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지를 잃었던 족장의 상태를 릴리아는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죽은 족장의 몸이 서서히 부서져 내리는 것까지도.

도대체 왜 족장의 목에 샬롯이 준다고 했던 검은빛의 마나석이 걸려 있었을까.

어떻게 된 일인지 릴리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샬롯이 하려던 일이 뭔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속여 인랑족의 족장과 같은 상태로 만들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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