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5화
복수할 테다. 자신의 오라버니를 죽이고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그 악녀에게, 똑같은 절망을 안겨 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그 지독한 세월을 혼자 견뎌 냈다.
릴리아는 에린을 향해 악에 받친 듯 외쳤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너 같은 악녀에게 왜 그런 재능이 있는 거야? 너 때문에 우리 오빠가……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런 그녀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릴리아는 자신을 막은 사람을 멍하니 바라봤다. 페르딘이 그곳에 있었다.
“릴리아.”
“…….”
“에린은…… 그녀는 혼자서라도 널 구하겠다고 인랑족의 영토로 들어왔어. 아직도…… 그녀가 칼립스를 죽였다고 생각해?”
페르딘의 말에 릴리아는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에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비난에 아무런 부정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서 있는 에린이 보였다.
그게 릴리아를 더 괴롭게 했다.
* * *
릴리아는 늘 에린 리서스란 사람에 대해 상상하고는 했다.
패악을 부리고, 칼립스를 괴롭히고, 끝내는 그를 죽인 사람이라고.
샬롯 역시 모든 죄는 에린이 저질렀다고 그녀에게 속삭이곤 했다.
“칼립스는…… 그 악녀에게 괴롭힘당하다가 죽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후작가의 시종직을 관둘 수도 없었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갔다고 들었어요. 그는 어린 동생을 위해 모든 고통을 감수한 거예요.”
“릴리아, 당신은 마법의 재능이 있으니, 충분히 복수할 수 있어요.”
그녀는 에린 리서스에게 복수해야 했다. 어렸을 적부터 세뇌하듯 다짐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에린 리서스는 악녀여야만 했다.
페르딘은 릴리아를 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에린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릴리아는 페르딘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인랑족의 영토에 오기 위해 움직인 이 주 동안 릴리아는 에린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에린 리서스는 그녀가 알고 있던 소문 속의 인물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고, 상냥했으며 신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릴리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샬롯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까?
그녀는 칼립스가 죽었을 때 온전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던 사람이었다.
후작 성에서 그와 친하게 알고 지냈다고 하며, 칼립스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에린 리서스가 정말로…… 칼립스를 죽인 게 아닌 걸까? 정말로?
릴리아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일단 움직이자. 릴리아, 네 마음도 알겠지만…… 지금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없어.”
아몬은 그렇게 말하며 릴리아를 이끌었다. 릴리아는 어딘가 멍한 얼굴로 그런 아몬에게 순순히 몸을 맡겼다.
지하 감옥을 나오는 순간에도 릴리아는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그들 앞에 인랑족 수십 명이 쓰러져 있었다.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소드 마스터의 힘에 릴리아는 소름이 돋았다.
“릴리아, 빨리 와.”
한눈을 파는 그녀를 페르딘이 이끌었다. 그의 품에 있던 아이는 어느새 아몬이 안고 있었다.
릴리아는 페르딘이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그녀를 챙기기 위해 아이를 아몬에게 맡긴 것이리라.
페르딘은 쓸데없을 정도로 친절했다. 그는 자신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내버려 두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 이번 토벌이 끝나면…… 페르딘을 떠나자.’
릴리아는 페르딘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추억이 떠올랐다.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에 처음 들어온 순간, 그리고 짓궂지만 상냥했던 기사단의 사람들.
행복했던 기억도 있고 슬펐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릴리아는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걸 확신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더는 에린 리서스를 볼 자신이 없었다.
“페르딘…….”
나, 이번 토벌이 끝나면 기사단을 떠날게.
릴리아는 분명 그 말을 꺼내려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창을 목격했다.
‘아, 나 이대로 죽는 건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릴리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까지 한 고민이 모두 덧없게 느껴졌다.
시커먼 마나가 맺혀 있는 창은 그녀가 절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앞서가던 에린이 뒤를 돌아 일행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그녀 역시 창을 발견한 건지 놀란 얼굴로 자신을 향해 뛰어왔다.
릴리아는 그런 에린의 모습을 보고 의문을 느꼈다.
대체 왜 그런 얼굴인 거야? 마치 충격을 받았다는 듯이…….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밀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릴리아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눈앞에 페르딘이 보였다.
* * *
코렐리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에 있던 과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런 코렐리아의 옆엔 샬롯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녀의 앞엔, 렉시아 제국의 1황자 디트리온이 앉아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은발을 가진 그는 기품 있는 자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언제 마셔도 샬롯의 차는 맛있어.”
그의 칭찬에 샬롯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코렐리아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왜 레이먼에게서 연락이 없지?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인랑족의 영토에 같이 따라 들어가진 않았을 거 아냐.”
“피치 못하게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흠…… 그러면 좀 안 됐는데…… 인랑족의 족장은 지금쯤 맛이 갔을 거 아냐?”
“황제께서 억제제를 주지 않으셨으니, 지금쯤 폭주했겠죠.”
“레옹 백작이 갔어도 어차피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군.”
코렐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 정도면 아실리 공작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상대하지 못할 테니까.
족장은 그전에도 이미 소드 마스터에 육박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폭주한다면, 레옹 백작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 샬롯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칼립스의 동생이라던 꼬마 마법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득한 거야?”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에린이 가끔 칼립스라는 이름을 중얼거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그 존재는 코렐리아에게 가치가 없었다.
“그쪽 인간들은 단순하잖아요? 복수심을 더 자극하니 결국 넘어오더라고요. 그리고 성공적으로 에린 리서스를 해치우면…… 이걸 준다고 했죠.”
“샬롯, 너 정말 나쁘구나?”
샬롯이 내민 구슬을 보며 코렐리아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디트리온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는 자신의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페르딘의 사람들은 뭐랄까…… 그 녀석을 닮아서 그런지 참 순진하군요.”
검은 기운이 풀풀 풍기고 있는 구슬은 언뜻 보면 마나석으로 착각할 만큼 비슷한 모양새였다.
아마 릴리아란 마법사 역시 조금 특이한 마나석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마나석이 아니었다.
흑마법을 이용해 가공한 특별한 마나석으로,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법사와 기사의 경지를 빠르게 높여 줬다.
한때 대륙에서 유행한 방법이기도 했다. 치명적인 부작용이 벌어지기 전까진.
마나석에 중독된 자들은 서서히 이지를 잃어 갔고, 마나가 폭주하면 마물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신전에 의해 금지된 방법이었다.
그러나 릴리아는 샬롯이 준다고 한 마나석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전이 알리고 다니는 예의 모습과 달라 보이도록 특별한 방법으로 다시 만들어 낸 거니까.
“뭐든지 확실히 해야 하니까요. 전 레이먼같이 허술한 녀석과는 다릅니다. 레옹 백작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토벌대는 도주하려 하겠죠. 그것만 해도 페르딘 렉시아는 큰 피해를 입겠지만…… 에린 리서스가 멀쩡한 게 싫으신 거잖아요?”
“…….”
“릴리아 정도의 마법사라면, 유망한 기사를 상대하기에 나쁘지 않죠. 그녀에겐 명분도 있으니 배후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도 않을 겁니다.”
뭐가 어찌 되든 나쁘지 않았다. 릴리아가 성공하면 노예 한 명이 더 생기는 셈이니까.
릴리아는 마나석에 중독된 채, 그들이 주는 억제제만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샬롯은 그야말로 악마가 분명했다. 코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온종일 기분이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감은 곧이어 후작 성에 들른 기사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레이먼 님이, 토벌대에서 이탈하셨습니다. 혹시 후작 성에 오지 않았는지 페르딘 경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그 기사가 가지고 온 소식에 코렐리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