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3화
믿겠다고? 나를?
믿어 달라고 하긴 했으나 진짜로 믿어 주겠다는 말이 돌아올지는 몰랐다.
뻣뻣하게 굳은 에린을 보고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죠, 에린 경. 돕겠습니다.”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에린은 문득 궁금해졌다.
언젠가 그가 모든 사실을 안 뒤에도 또다시 믿겠다는 말을 해 줄까……?
그녀가 얼마나 많은 비밀을 지니고 있는지 페르딘은 모르고 있다.
그러니 진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지금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에린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심장이 뛰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페르딘이 그녀를 믿는다니.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어쩐지 그 믿음에 보답을 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이곳을 안전하게 빠져나가야만 하겠지.’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 * *
인랑족을 상대하는 에린의 검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인랑족이 쓰러졌다.
인랑족들도 매섭게 공격했으나 그들의 손톱은 에린의 손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녀는 페르딘마저 파악하기 어려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악마! 악마가 나타났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저렇게 강할 리가 없어.”
어느 순간부터 인랑족들이 에린을 보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녀의 손속엔 자비가 없었다.
페르딘은 그런 에린을 옆에서 주위의 인랑족을 견제하며 의문을 느꼈다.
‘인랑족이 원래 이렇게 약했나?’
그녀의 검에 쉽사리 쓰러지는 인랑족을 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인랑족의 손톱은 날카로웠고, 그 기세는 중급 기사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러나 에린은 숨을 쉬듯 편한 기색으로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만약 페르딘이 에린의 옆에서 함께 인랑족을 상대해 보지 않았더라면 진짜로 그들이 약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급 기사 수준의 수인족 스무 명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페르딘이 아는 한 소드 마스터밖에 없었다.
‘혹시 그 터무니없는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페르딘은 마물 토벌 당시 등장한 소드 마스터에 대해 사람들이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그 소드 마스터의 정체가 에린 리서스라는 말이 있던데? 공녀님을 구해 줘서 둘이 친해진 거라고.”
“그 악녀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듣기론 그건 소드 마스터의 흔적이 아니라…….”
물론 그 말을 들은 페르딘의 사나운 눈빛에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바로 도망치긴 했지만, 그런 소문이 돈 적도 있었다.
끝내 감옥을 지키던 인랑족이 모두 쓰러지자 페르딘은 에린을 경이롭다는 듯 바라봤다.
그녀는 엄청난 일을 한 사람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페르딘 경,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지하 감옥의 문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지하 감옥에 들어가 주변을 살폈다.
페르딘도 아이를 안아 든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감옥에 들어선 그들을 제일 처음 반긴 건 차가운 공기였다. 그에 추위를 느낀 아이가 페르딘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페르딘은 그런 아이를 보며 너무 정신이 없던 나머지, 지금까지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름이 뭐니?”
그의 말에 아이가 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게 아니에요.”
“…….”
“전 이름이 없어요.”
“그런…….”
“죄송해요…….”
페르딘은 인상을 쓰며 아이를 꽉 껴안아 주었다.
언뜻 본 과거와 짧은 대화만으로, 아이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천박한 녀석.”
“더러운 피는 어디 가지 않는구나. 쯧쯧.”
그의 머릿속에 어렸을 적부터 황제에게 자주 듣던 비난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그게 자신의 잘못인 줄 알았다.
이 아이 역시 이름이 없는 것과 불행하게 사는 것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는 품 안의 아이를 다시 고쳐 안고,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에린의 등을 응시했다.
전투를 위해 대충 땋은 머리가 살랑이고 있었다. 작은 어깨가 어딘가 모르게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때, 머리에 내리꽂히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페르딘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는 곧 자신의 이능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 그를 휘감았다.
이건, 몸의 고통이 아니었다. 에린의 기억 속에…… 그녀가 느꼈던 마음의 고통이었다.
“에린, 말을 안 듣는 아이는 어떻게 된다고 했죠?”
“잘못…… 잘못했어요, 어머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기억 속에 리서스 후작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짜증이 난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페르딘은 황성에서 종종 리서스 후작 부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상냥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고 모든 레이디가 선망하는 사교계의 거물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작 부인은 황자들의 교육을 명목으로 황궁에 불려 오기도 했다.
하지만 페르딘이 그때 보았던…… 온화한 얼굴의 후작 부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에린의 기억 속 그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앞에서 어린 에린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의 얼굴에 체념이 어려 있었다.
이능이 다시 발휘됐다.
눈앞의 공간이 뒤틀리며 페르딘의 눈에 침대 위에 홀로 누워서 울고 있는 에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안 돼…….”
어린 에린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보고 싶어, 칼립스…….”
페르딘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심장께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둘러 아이를 땅에 내려놨다.
가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에린이 놀란 듯 그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곧 그녀가 붙잡은 팔에서 걱정으로 인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갈수록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에린이 그를 향해 외쳤다.
“페르딘 경!”
페르딘의 이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야가 일그러지며 또 다른 공간이 보였다.
목걸이에서부터 이능이 발휘된 것이다.
그곳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처음 보는 장소였다.
페르딘은 그곳에서 쓰러져 있는 자신을 목격했다. 그는 복부와 어깨에 칼이 박힌 채, 죽어 가고 있었다.
그의 이능은 과거만을 보여 줬다. 하지만…… 페르딘은 한 번도 이런 상황을 맞이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능이 보여 주고 있는 이 상황은…… 도대체 뭐지?
죽어 가고 있는 자신의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는 목걸이를 움켜쥔 채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페르딘은 걸음을 옮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들리는 에린의 이름에 페르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에린…… 불행…… 제발…… 그녀를…….”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페르딘은 계속해서 쓰러져 있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잊지 마.”
그가 그 무엇보다 분명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를 울리는 강한 충격에 페르딘은 두 눈을 번쩍 떴다.
“페르딘 경!”
에린의 목소리에 그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걱정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딘은 과도하게 사용된 이능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에린은 휘청거리는 페르딘을 부축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당황이 가득했다. 페르딘은 그런 에린의 모습을 보며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에린은…… 칼립스를 죽이지 않았다.
왜 그런 거짓 소문이 퍼진 건지 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내내 의심하고 있던 사실이 방금 전의 이능으로 확실해졌다.
언뜻 본 기억만으론 에린이 살아온 인생을, 페르딘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 않은 일로 악녀로 매도당한 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다니…… 페르딘은 눈앞에 작은 여인이 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에린 경…….”
“괜찮아요? 머리가 아프신 건가요?”
에린은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신경 썼다.
페르딘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에린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그 맑은 눈동자에 페르딘은 순간적인 충동이 일었다. 그는 에린을 붙잡은 채 묻고 싶었다.
후작 부인이 대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당신은 사람들이 말하는 악녀가 아니지 않냐고.
칼립스 역시, 당신이 죽인 게 아님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알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혹시 우리가 언젠가 만난 적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