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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32화 (32/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2화

으아아.

아이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떨고 있었으나 인랑족이 그런 아이의 상태를 신경 써 줄 리가 없었다.

에린은 곧장 허리께에 꽂혀 있던 단도를 뽑아 던졌다. 그녀가 던진 단도는 그대로 인랑족의 손을 꿰뚫었다.

“크윽-.”

이제부터는 속전속결로 해치우는 게 중요했다. 페르딘과 에린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페르딘이 곧바로 에린을 뒤따랐다.

“누구냐!”

“침입자들이다!”

에린과 페르딘을 발견한 인랑족이 소리쳤다.

에린은 제일 먼저 소리 지른 놈의 머리를 검등으로 내리쳤다. 마나가 담긴 엄청난 힘에 순식간에 한 명이 기절했다.

페르딘 역시 기습으로 한 명을 빠르게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 다 깊게 생각해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고통받는 아이를 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순간 인랑족 한 명이 긴 손톱을 이용해 에린의 옆구리를 빠르게 찔러 왔다.

이에 그녀가 검을 들어서 공격을 막으려 할 때였다.

페르딘이 먼저 그녀에게 달려드는 인랑족의 팔을 베어 내는 게 보였다.

그에 맞춰 에린은 그 인랑족의 배를 발로 찼다.

마나가 담긴 다리에 맞은 인랑족은 멀리 나가떨어지며 순식간에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아마 한동안은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페르딘이 그 모습을 보고 두 눈에 이채를 띄웠다. 그건 에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실력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난민들을 구출하는 난제가 남아 있었지만, 아몬과 릴리아를 구출하는 일까지는 수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구출한 다음에 그녀 혼자 따로 인랑족의 영토에 와 난민들을 구하면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실력을 의심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희망에 부풀었다.

그녀는 평화로운 아카데미 생활을 잠시라도 더 누리고 싶었다.

만약 그녀가 소드 마스터란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 생활을 더 지속할 순 없을 테니까.

순식간에 열 명의 인랑족이 전투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페르딘은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놀라울 정도의 실력이군요, 에린 경.”

페르딘은 상급반이었고, 에린은 초급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에린의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초급반에 있을 실력이 아니었다. 웬만한 상급 기사 두 명으로도 이보다 빠르게 인랑족 열 명을 제압할 수는 없으리라.

아마 좀 더 시간이 걸리다 지원 온 다른 인랑족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됐겠지.

페르딘은 얼마 전에 아실리 공작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요즘엔 영…… 지켜볼 만한 인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쓸모 있는 녀석을 한 명 봤단 말이지.”

페르딘은 그때 아실리 공작이 칭찬한 사람이 아몬인 줄 알았다. 그는 게으른 편이었지만 확실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실리 공작이 칭찬할 정도였나 하고 놀랐었다.

그도 그럴 게 아실리 공작은 엄청난 실력자들이 모여 있다는 제1 기사단원들에게도 유난히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쓸모 있는 녀석’이란 말은 그에게 있어 엄청난 극찬이었다.

그런데 방금 문득 아실리 공작이 말한 그 녀석이 에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십수 년의 세월 동안 훈련한 그와 아몬보다 에린이 강하다니.

“아니요. 이건 생각보다 저희의 호흡이 잘 맞아서…….”

“호흡이 잘 맞긴 했죠.”

작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다가간 그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처에 인상을 썼다.

페르딘은 자세를 낮추어 아이와 두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아이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게 뭐야?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해?”

“괴물 아니야?”

“꺼져, 이 괴물아!”

마법을 사용하는 아이를 보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괴물이라고 매도당하다 버려진 아이.

소년은 정처 없이 떠돌다가 피난길에 오른 난민 사이에 섞여 들어갔고, 그대로 인랑족에게 붙잡혔다.

그 이후 마법사란 사실이 들통나자 아이에게 행해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한 일들…….

페르딘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남의 기억을 읽는 일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의 기억을 뇌리에 각인시키곤 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끔찍한 기억일수록 페르딘의 피로도는 극심해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조심스럽게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이는 누군가에게 반응할 힘도 없는지 페르딘을 힐끔 보고는 몸을 웅크렸다.

그저 바싹 마른 팔로 얼굴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숨기려 했다.

일반적인 성인들도 공포에 질릴 만한 경험이었다. 그게 아니어도 이런 상황에 처한 아이가 패닉 상태에 빠지는 건 당연했다.

페르딘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아이에게 속삭였다.

“우린 너를 해치지 않아.”

그 다정한 말에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페르딘은 아이가 조금이라도 진정될 수 있도록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어서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 아이가 마법사인 이상 인랑족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아이와 함께 인질로 잡힌다면, 인랑족은 더 많은 마법사를 요구하겠지.

아이는 페르딘의 품에 고개를 박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을 하기 힘든 상태인 것 같았다.

“에린 경, 아몬과 릴리아를 구하고 돌아가려 합니다. 괜찮을까요?”

마법사인 릴리아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 당장 구해 내야 하지만, 난민들까지 구할 여력은 없었다.

인랑족이 릴리아에게도 똑같은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페르딘은 마음이 급해졌다.

“문제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건데…….”

“제가 알고 있어요.”

“……?”

“아몬의 마나가 느껴져요.”

어떻게? 페르딘이 의아한 듯 입을 열려고 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넓은 반경에서도 동료를 찾는 게 가능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초인의 영역이었다.

일반적인 초급반의 예비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에린이 인랑족을 상대한 것 역시,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페르딘이 에린에게 어떻게 한 거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함성이 울렸다.

“침입자다!”

에린이 페르딘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한 채 아몬의 마나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의 기척이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아마 지하 감옥 비슷한 곳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주변에 인랑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스무 명…….’

나쁘지 않았다.

그 생각과 동시에 에린은 검을 움켜잡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페르딘은 한 손으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그녀를 뒤쫓아 달렸다. 뒤편에서는 인랑족이 그들을 쫓아왔다.

몇몇 인랑족이 앞쪽에서 나타나기도 했지만, 에린은 페르딘이 의아할 정도의 속도로 그들을 무찔렀다.

그들은 곧 지하 감옥 앞에 도착했다. 에린의 놀라운 탐지 능력 덕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지하 감옥까지 올 수 있었다.

그걸 보며 페르딘은 어쩌면 큰 피해 없이 아몬과 릴리아를 데리고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하 감옥 앞에는 스무 명의 인랑족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역시 무리였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을 노려봤다.

보초를 세워 뒀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많은 수가 경비를 서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긴 이제까지 오는 길에서 이상할 정도로 인랑족과 많이 마주치지 않은 터였다. 아무래도 그들의 운은 여기까지인 거 같았다.

페르딘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린을 바라봤다.

그는 에린에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이 이상 나아가는 건 불가능하니 아이와 도망치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페르딘의 눈에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의 에린이 보였다.

그녀가 그를 향해 말했다.

“뚫고 가죠, 페르딘 경.”

“에린 경, 스무 명의 인랑족을 저희 둘이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자 에린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전…… 사실 페르딘 경이 상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강해요. 그러니 저를 믿어 주세요.”

에린은 페르딘이 자신을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했다면 미친 사람 취급했으리라.

실전 경험이 적은 아카데미 학부생 두 명이 스무 명의 인랑족을 무찌르겠다는 건 그녀가 생각해도 현실성 없는 일이었으니까.

만약 그가 자신을 믿지 않으면 전신에 마나를 둘러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밝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 고민이 무색하게, 잠시 에린을 바라보며 무언갈 생각하던 페르딘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네?”

“에린 경을 믿어요.”

페르딘의 말에 에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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