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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31화 (31/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1화

에린은 나무둥치에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페르딘은 그런 에린을 빤히 쳐다봤다. 인랑족의 영토 안에서도 그녀는 두려운 기색이 없어 보였다.

강하면서 호전적인 인랑족의 땅에 들어온 사람이면 보통 겁을 먹는 게 정상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땅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도 않았겠지.

“경을 보면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듭니다.”

“…….”

“뭔가를 잊은 듯한 기분이 들어요.”

페르딘이 반쯤 충동적으로 그 말을 꺼냈다.

하지만 작게 흘러나온 그의 말은 에린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그녀의 손끝이 옅게 떨렸다.

페르딘은 그런 에린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은 듯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린은 페르딘이 가진 이능을 떠올렸다.

과거, 그가 ‘진실을 보는 눈’을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황제는 페르딘을 더욱 핍박했다.

단순히 다른 이들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이능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면 혹시 그 자신의 과거를 본 것일까?

에린은 두려워졌다.

그 비극적인 미래들을 그가 봤다면…… 그녀 때문에 죽게 됐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에린 경?”

에린은 페르딘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의 맑은 푸른빛 눈동자가 그녀를 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에린은 입매를 굳혔다.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길 잃은 강아지 같았다.

페르딘이 보기에도 꼴 보기 싫은 얼굴이리라.

에린은 간신히 입을 열어 그에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신경 쓰지 마세요. 긴장한 탓에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나 봅니다. 이곳이 안전한 장소는 아니니까요.”

페르딘은 그녀의 물음에 그제야 본인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에린에게 있어선 당황스러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에 에린은 모르는 척 그의 말을 넘기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인랑족에게 당할까 봐 걱정되시나요?”

에린은 몸을 일으켜 페르딘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왜 이곳까지 들어오신 거예요?”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아몬도, 릴리아도, 에린 경도 저 때문에 이곳에 왔으니까요.”

“…….”

“이제까지 절 지키려고 많은 사람이 희생했습니다. 또다시 무책임하게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에린의 말에 페르딘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래도 제가 이곳에 온다면, 릴리아와 아몬이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들 대신 인질로 붙잡히더라도 제 신분을 알게 되면 함부로 죽이지 못할 겁니다.”

아마도요.

페르딘이 그렇게 덧붙이며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뒤 씁쓸하게 웃으며 에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애달픈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에린은 그를 그런 슬픈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했다.

그게 언제부터인지 페르딘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렴풋이, 소문처럼 에린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와 파혼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는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설마 중립을 지키던 리서스 후작이 황제의 편에 붙은 건가? 그래서 그를 감시하기 위해 에린이 억지로 자신과 약혼을 한 거고…….

그렇다면 파혼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페르딘은 아몬과 공녀를 지키려다가 피투성이가 됐던 에린을 잊지 못했다. 자신을 미워하라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을.

그때 그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린이 보내는 눈빛의 의미만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미워하라는 말과 다르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절절함을 품고 있었다.

페르딘은 자신을 동경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이미 익숙한 편이었다.

안면이 없음에도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에린의 눈빛은 그들과 달랐다. 그게 어떤 감정이냐고 묻는다면, 페르딘도 감히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깊은 감정을……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에린 경은 왜 저와 파혼하고 싶으신 거죠?”

그의 말에 에린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는…… 당신과 파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며, 페르딘의 머리가 흩날렸다.

하늘에 노을이 지며 그의 금발이 붉게 물들었다.

단호한 입매와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에린은 속이 울렁이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들은 말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페르딘이 뭐라고 말한 거지……?

“왜……?”

왜 당신은 과거와 똑같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나요……?

그렇게 상냥한 눈으로 왜…… 저를 착각하게 만드나요.

에린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별안간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녀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둘러 뒤돌아섰다.

페르딘 역시 상황을 눈치채고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뛰어!”

“어서 움직여!”

인랑족 여러 명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작은 아이가 보였다.

그들이 위협적인 움직임을 가할 때마다 가느다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얼핏 본 아이의 몸엔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인랑족은 잘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갔다.

아이는 어떻게든 몸을 방어하려 했으나, 오히려 상처만 더 생길 뿐이었다. 깡마른 팔의 움직임이 애처로웠다.

에린은 아이의 두 눈을 살폈다. 텅 빈 눈동자는 이미 삶의 의지를 반쯤 잃어버린 상태였다.

곱슬기 있는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에린은 그 아이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미래에 인랑족의 선두에 서서 제국인들을 학살할 마법사였다.

에린과 페르딘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조용히 인랑족을 따라갔다.

아이가 짧은 비명을 지를 때마다 에린은 기분이 더러워지는 걸 느꼈다.

과거 인간들을 학살했던 마법사가 난민 중 한 명이란 사실은 짐작했으나 이런 취급을 받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아이의 모습이 자신의 과거와 꼭 닮아 있었다.

에린은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건…… 너무하잖아.’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어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에린은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그 감정을 억눌렀다.

“영토 안으로 들어온 놈들은 어떻게 된 거지?”

“내버려 두라고 하시더군. 이 작업을 마무리하면 상대하신다고 하셨어.”

에린의 몸이 경직됐다. 미래에 봤던 인랑족의 마법사는 앞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페르딘은 앞으로 튀어 나가려고 움찔거리는 에린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억지로 저런 짓을…… 대체 왜?”

“따라가야 해요.”

“승산이 없어요, 에린 경. 가 봤자 인랑족에게 납치되어 인질이 될 겁니다.”

에린의 몸이 굳었다. 페르딘의 말은 냉정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인랑족을 따라간다는 건 죽여 달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페르딘의 말에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에린 경, 릴리아와 아몬을 찾아서 도망치세요. 제가 저들의 주의를 끌겠습니다. 그럼 저 아이의 눈도 지킬 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께서 제가 수인족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겁니다.”

“…….”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맑고, 강직했다.

에린은 그런 페르딘의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다정한 사람. 예전에 그녀가 알던 페르딘의 모습 그대로였다.

인랑족이 아이를 이끌고 간 곳은 거대한 공터였다. 그곳에는 이미 여섯 명에 가까운 인랑족들이 뭉쳐 있었다.

그중 채찍을 들고 있는 인랑족이 아이를 거칠게 땅에 밀었다.

에린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인랑족의 손에 불에 달군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페르딘은 아직 검에 마나를 씌우지는 못하지만, 조만간 상급 기사가 될 정도로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

에린 역시 자신이 설정한 천재적인 실력을 상급 기사와 비슷한 정도로 설정해 두고 있었다.

상급 기사 둘이 인랑족 열 명을 해치우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녀가 인랑족을 상대하는 걸 본 페르딘이 실력을 의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빠르게 해치워야 한다.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바로잡았다.

“빨리 해치우고 가자고. 족장님께서 마법사 인간 여자와 기사 남자를 포획하셨다고 했어. 그리고 침입자도 있다던데?”

“침입자라고? 죽고 싶은 건가?”

인랑족들은 그렇게 말하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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