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30화
“에린!”
페르딘은 초조해졌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숲이 우거진 방향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의 눈에 에린이 인랑족을 유인하며 인랑족의 영토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기사들이 도망치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페르딘, 뭐 해! 빨리 와! 뭐야. 에린 리서스는 왜 또 저깄어! 미친 건가 진짜?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데렉은 기겁한 얼굴로 에린이 향한 곳을 보며 페르딘의 팔을 잡아끌었다.
인랑족의 영토 안에 들어가는 것과 들어가지 않는 것은 위험도가 달랐다.
저곳에 들어가면 완전히 끝이었다.
인랑족은 자신의 영토 안에 들어온 인간들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거로 유명한 종족이었다.
“페르딘, 네 어깨에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어. 그런 짐을 지워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약속해 주렴. 삶이 괴로워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로…….”
그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건 페르딘이 지옥 같은 삶을 지금까지 이어온 이유 중 하나였다.
자신의 실력으로 다수의 인랑족과 맞선다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랑족에게 인질로 붙잡혀 제국의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황제는 신이 나서 더 그를 물어뜯으려 하겠지.
이건 멍청한 일이었다. 페르딘은 머리로는 이것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걸 알았다.
그가 에린을 따라 저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무언가가 달라질까?
아니,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제껏 운명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그의 삶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어머니, 이상한 예감이 들어요. 지금 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은 예감이.’
고민은 짧았다. 페르딘은 자신의 목에 걸린 수수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는 자신을 잡아끄는 데렉의 팔을 뿌리친 뒤 망설임 없이 인랑족의 땅으로 뛰어갔다.
* * *
“당신을 증오해.”
에린은 과거를 떠올렸다. 페르딘이 죽고 얼마 되지 않아 릴리아가 그녀를 찾아왔었다.
당시 그녀는 에린을 더는 볼 수 없다며 페르딘의 기사단을 나갔고, 마법사의 탑에서 최연소 5서클 마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찬란한 미래로 가득했다. 에린은 언젠가 릴리아가 그녀에게 복수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분히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페르딘이 죽은 이후, 에린은 모든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페르딘이 그녀에게 행복하게 살아 달라고 한 말이 마음에 남아 삶의 끝자락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릴리아가 온 그날, 에린은 약간이지만 희망을 품었다. 드디어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고.
그리고 천국에 가면 페르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수십 번 생각했어. 당신을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풀릴지.”
릴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녀는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눈감을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릴리아는 손에 힘을 주지 않고 에린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날, 최연소 5서클 마법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릴리아는 에린을 죽이는 대신 자신을 죽이는 걸 선택한 것이다.
에린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됐다. 그때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먹먹한 감정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에린은 눈을 감은 채 주변의 기척을 읽었다. 인랑족들이 뒤를 바짝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일부러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인랑족의 영토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영토에 대해 집착하는지 알고 있기에 한 선택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페르딘?’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페르딘이 왜 여깄지?
에린은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얼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인랑족 다섯 명도 그녀 말고 페르딘을 발견한 것 같았다. 놈들이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을 보니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
에린을 쫓아가느냐, 아니면 새로 들어온 페르딘을 노릴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인랑족들이 이내 그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감히…….’
에린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날렸다. 방금까지 달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넌……!”
갑작스럽게 나타난 에린을 보고 인랑족이 소리를 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목덜미를 베어 내는 게 더 빨랐다.
에린의 얼굴에 피가 튀며, 순식간에 인랑족 한 명을 해치웠다.
그에 이어 그녀는 기습을 시도하는 다른 인랑족의 복부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두어 번 검을 더 휘두르자 나머지 인랑족 두 명 또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누…… 누구냐! 인간, 아니, 인간이 맞나?”
나머지 한 놈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눈에 눈앞의 인간 여자가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란 걸 깨달은 것이다.
원래 에린은 얌전히 그들을 유인하면서 릴리아가 있는 곳까지 가려고 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네놈을 죽이지는 않을 거야. 말을 전해야 하는 자가 필요하니까.”
에린의 말에 인랑족이 뒷걸음질 쳤다.
죽이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기세는 당장이라도 목을 벨 듯 사나웠다.
인랑족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쓰러진 자들은 인랑족 내에서도 뛰어난 전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인간 여자에 의해 한순간에 쓰러졌다.
인랑족은 강함을 추구하는 종족이었다. 그는 눈앞의 여자를 보며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강하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인간 여자의 두 눈이 섬뜩했다. 그녀의 눈 안에 어둠이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족장에게 전해. 납치해 간 인간들을 건드리면…….”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인랑족의 목에 검을 가까이 댔다. 서슬 퍼런 검날이 그의 목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그 섬뜩한 예기에 인랑족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라고.”
* * *
“페르딘.”
미친 듯이 달리던 페르딘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에린이 나무 위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르딘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이 먼저 터져 나왔다.
다행이다. 그녀까지 인랑족에게 잡히진 않았구나.
에린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쫓던 인랑족에게서 벗어난 것 같았다.
“왜 이곳에 계신 거예요?”
“에린 경이야말로 대체 왜 이곳까지 들어오신 겁니까.”
페르딘의 말에 에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변명할 말이 없었다.
혼자서 인랑족을 물리치고 릴리아와 아몬을 데려갈 생각이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녀는 대답 대신 나무에서 뛰어내려 페르딘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페르딘이 왜 여기 있는 걸까? 설마 내가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온 걸까?’
그럴 리가 없잖아. 에린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아가세요.”
그녀의 덤덤한 말에 페르딘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요?”
“전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설마 릴리아와 아몬을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들어온 건 아니겠죠? 그것도 혼자?”
페르딘의 말에 에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해서 만약 거짓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침묵을 택하곤 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에린을 바라보던 페르딘이 그녀의 옆에 섰다.
“할 일이 있다면, 같이 끝내고 가면 됩니다. 혼자 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에린이 곤란한 듯 인상을 썼다.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페르딘은 그녀가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모른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 인랑족의 영토로 들어가는 그녀의 행동을 봤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에린은 페르딘도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럼 어떻게든 설득해서 자신은 이곳에 남을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잘된 걸지도 모른다.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모순적이게도 인랑족의 영토에 들어온 이상 자신의 옆이 제일 안전할 테니까.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페르딘 역시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에린은 자신이 보낸 인랑족의 기척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능숙한 손길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에린은 해가 저무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조금만 쉬다가 가요. 체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아직은 몸이 지나칠 정도로 약했다. 조금 뒤에 있을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기 위해선 조금이나마 쉬어 둬야 했다.
페르딘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