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28화
카론은 레이먼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에린을 보호하라고 명했는데 말도 없이 그냥 떠났다고?’
게다가 아무리 정식 토벌대가 아니라지만 중간에 멋대로 자리를 이탈하는 건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명확한 이유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현재 레이먼에게 에린을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임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토벌대의 사람들은 레이먼을 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특히나 카론의 눈에는 페르딘 역시 레이먼이 사라진 걸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그래도 예의상 찾는 척은 할 생각인지 페르딘이 기사 한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레이먼 경이 후작 성으로 갔는지 확인하고 오도록.”
카론은 최종 의사 결정권자의 뜻을 거스를 생각이 없었다. 그 역시 최근 레이먼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레이먼 역시 자신을 꺼리는 토벌대의 분위기를 느끼고 조용히 떠난 걸지도 몰랐다.
카론은 그저 상급 기사인 레이먼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왜 그랬는지 나중에 토벌이 끝나고 후작 성에서 만나면 물어보면 되겠지, 뭐.’
하지만 카론은 레이먼을 만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가 토벌을 끝나고 돌아와도, 레이먼은 후작 성에 없을 테니까.
* * *
인랑족의 영토에 도달하는 건 길고 긴 여정이었다.
열흘이 지나자 토벌대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험준한 산맥을 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단련된 기사라도 체력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기사들은 나았다. 몇몇 학부생들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인랑족의 영토에 도달할 거였다.
하지만 아몬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 자리에 드러눕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힘든 임무를 자주 했던 그라도 지칠 수밖에 없는 강행군이었다.
애초에 황제가 페르딘을 괴롭히기 위해 보내는 임무였기 때문에 더럽게 힘들었다.
황제는 툭하면 터무니없는 기간을 주고는 임무를 완수하라며 페르딘을 닦달하고는 했다.
디트리온에게 내리는 쉬운 임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레이먼이라는 기사가 도망친 거일지도.’
그도 페르딘도 레이먼이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에린을 바라보는 끈적하고 더러운 눈빛은 둘째 치더라도…… 아몬은 후작가의 사람들을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그는 아직도 에린의 등 뒤에 있던 흔적들을 잊지 못했다.
도대체 그녀가 후작가에서 어떤 일을 당한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에린이 당했을 그 짓이 비정상적이란 건 바보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아몬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상급 기사의 기민한 감으로 이 임무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한 거일지도 모른다.
페르딘이 레이먼을 찾지 않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상급 기사는 분명 중요한 전력이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자가 있어 봤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그가 중요한 순간에 자신들의 뒤통수를 내리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지금 떠나 버리는 게 나았다.
“으악!”
갑작스럽게 들린 비명에 아몬은 시선을 돌려 에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땀방울을 흩날리며 뇌가 근육으로 가득 찬 것 같은 멍청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요 며칠간 벌어진 이 기괴한 현상에 아몬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에린, 죽어!”
“아니…… 필립, 아무리 그래도 죽으란 건 심한 거 아니야?”
“내 차례야, 필립! 좀 비켜! 넌 아까도 대련했잖아!”
“너야말로 저리 가!”
예비 기사들은 각자 이상한 기합을 내뱉으며 에린에게 검을 내질렀다.
서슬 퍼런 기세가 진짜로 에린을 베어 버릴 것 같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저 자식들은 정말 진심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베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린은 그 검을 전부 받아 내며 종종 반격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대련 이후 아몬도 열심히 검을 수련했지만, 저기에 낄 자신은 없었다.
걷기만 해도 힘든데, 대체 틈이 날 때마다 대련하는 발상은 누가 해 낸 건지.
다른 학부생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쉬기도 힘든 상황에서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예비 기사들이 정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소문은 진짜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아몬은 에린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 중 하나를 떠올렸다.
“에린 리서스는 게을러서 검을 연마하지 않는다.”
온종일 검만 휘두르던데?
“힘든 일을 싫어하고…….”
저기 근육 바보들이랑 대련하고 있는 건 누구지?
에린의 숨소리가 빨라졌다. 그런 그녀를 아몬은 홀린 듯이 바라봤다.
그녀가 검을 빠르게 찔러 넣자, 필립이 기겁을 하며 물러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대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필립의 옆에 있던 다른 두 명의 예비 기사들이 협공해서 그사이를 치고 들어갔다. 에린의 팔과 다리를 향해 검이 쇄도했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뒤로 뺌과 동시에 다리 쪽으로 찔러 들어오는 검을 막아 냈다. 그리고 묘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팔 쪽으로 향해 오는 검을 피해 냈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며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눈 안에 옅은 놀라움이 서렸다.
인랑족의 영토로 향하는 열흘은 에린 리서스란 사람을 다시 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름답다.’
아몬은 저번에 그녀와 대련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또 느끼고 있었다.
그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몬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더워지는 걸 느꼈다.
또 이런 불순한 생각을 하다니. 그는 자신을 벌하는 의미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에린은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검을 맞대고 강함을 증명하는 건 신성한 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옳지 않았다. 적어도 아몬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 정신없이 대련을 하던 필립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에린에게 달려드는 다른 학생들을 만류했다.
“야, 이제 그만둬.”
엄청난 ‘천재’인 에린에게도 약점이 존재했는데, 바로 다른 이들보다 체력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필립의 말에 다른 기사들도 눈치껏 검을 거뒀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명예로운 대련이었습니다, 에린 경.”
‘명예로운 대련은 무슨. 셋이서 달려들었으면서.’
아몬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린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건넸다. 그가 내민 손수건에 에린의 얼굴이 굳었다.
몇 번을 겪어도 적응되지 않는 친절함이었다.
에린은 손수건을 받아 들고 이마를 닦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아몬이 흐뭇한 듯 미소 지었다.
* * *
데렉도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에린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삼 대 일의 엄청난 대련에 혀를 내두르며 페르딘에게 말했다.
“와,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에린 리서스의 실력이 저 정도인 것도 놀랍긴 한데…… 아몬이 손수건 건네는 거 봤어? 뭐 때문에 저렇게 변한 건지. 저번 마물 토벌 후부터 이상해졌어.”
그러나 페르딘은 데렉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데렉이 의아한 듯 그에게 물었다.
“페르딘, 대체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그는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데렉의 시선이 페르딘을 따라 이동했다.
페르딘의 눈은 정확히 아몬의 손수건으로 향해 있었다. 그에 데렉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저 손수건이 뭐라고 저렇게 보는 거지……?’
궁금증이 일었으나, 그는 차마 페르딘에게 묻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페르딘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 * *
코렐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후작 성의 첨탑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다.
하녀들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고, 그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항상 엄격하지만 자상한 후작 부인의 모습을 연기했다.
하지만 때때로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후작가의 새 안주인에게 더 성심을 기울일 테니까.
딸이 패악을 부리는 걸 막지 못하며 비련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 정도면 충분하리라.
‘어리석은 인간들.’
코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후작 성의 위에서 기사들의 연무장을 내려다봤다.
한 소녀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에 담긴 기세가 매서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녀가 수십 번 검을 휘두르는 동안 코렐리아는 그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을 잡는 사람이라면 소녀의 솜씨가 범상치 않단 사실을 바로 알아챌 수 있으리라.
코렐리아는 소녀의 뒷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에린 리서스……?’
그 소녀는 에린이었다.
하지만 에린의 검이 저렇게 날카롭다니? 아무리 꿈이라지만 웃기지 않는가.
코렐리아의 손이 옅게 떨렸다.
검을 휘두르던 에린의 고개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코렐리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코렐리아는 지금 이곳이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가끔 이런 꿈을 꿀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꿈속에선 대부분 평화로운 일만 벌어지다가 잠에서 깨어나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에린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어려워했다. 그런 에린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그 순간 에린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코렐리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갖고 싶어도…… 당신은 갖지 못해.”
코렐리아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