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27화 (27/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27화

평소였다면 모른 척 시치미를 뗐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만큼 레이먼은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었다.

에린은 그런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에 레이먼은 희게 질린 채 외쳤다.

“난…… 난, 항…… 복했다고…… 기사가 항복한 자에게 이러는 건…… 옳지 않아.”

고통 때문에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먼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말을 멈추면 진짜로 돌이킬 수 없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너…… 사람을 죽이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믿었잖아…….”

“맞아, 레이먼. 난 그렇게 믿고 있어.”

에린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첫 번째 삶의 순진했던 그녀는 자신이 천국에 갈 거라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니까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아주 먼 옛날, 아카데미에서 자신이 밥을 주던 고양이 티티가 죽은 그날.

에린은 티티의 묘지 앞에서 울며 신에게 기도했다.

‘어머니 말도 잘 듣고, 앞으로도 착하게 살 테니까 티티랑 천국에서 만나게 해 주세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게요. 제발요. 티티랑 다시 만나고 싶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악마를 상대하려면 똑같은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티티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지옥에 떨어질 테니까.

에린은 검을 추켜올렸다.

그 모습을 본 레이먼은 공포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레이먼은 그녀를 향해 외쳤다.

“악마……!”

에린은 그 말에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검이 그대로 레이먼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에게 과거에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에린이 속삭였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모든 일이 끝나고,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

* * *

뒤처리는 어렵지 않았다.

세 번째 삶에서 에린은 마물들에게 쫓기는 상황을 자주 겪었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그녀는 핏자국이 묻은 나뭇잎을 수습하고 향을 지우는 가루를 뿌렸다.

토벌을 나오기 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었다.

남부 산맥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준했고 절벽도 많았다. 게다가 마물이 많지 않은 이곳엔 그만큼 다양한 짐승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에린은 절벽 아래에 레이먼을 방치했다.

‘배고픈 늑대들이 많은 만큼 시체가 빠르게 사라지겠지.’

토벌대는 정해진 기간 안에 인랑족의 영토에 도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람 한 명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대규모의 인원을 풀어 수색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레이먼은 상급 기사였다. 그런 그가 산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라.

아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어 후작가로 돌아갔을 거로 추측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는 아카데미 학생도 아니었고, 귀족도 아니다. 실력 있는 기사인 만큼 사교계에선 거의 귀족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지만, 이곳에선 한 명의 기사일 뿐이다.

이런 산에서 짐승이나 혹시 모를 마물에 죽을 상급 기사라면 없는 게 나을 거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을 테지.

첫 번째 삶에서 겪었던 그녀의 죽음만큼 레이먼의 죽음 역시 참으로 초라했다.

‘죽음은 다 똑같구나.’

에린은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을 제 손으로 끊어 냈는데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한참 동안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나.

심장이 느리게 쿵쿵 뛰었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카데미의 중앙 홀.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이 항상 모이는 회의실에 에린은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었더라. 아니 사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던 거로 기억한다.

과거에 그녀는 페르딘이 보고 싶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를 찾아가곤 했다.

물론 그런 행동 역시 그녀의 존재 자체가 페르딘에게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그만두었지만…….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몇 번이나 그를 만나러 근처를 기웃거렸다.

그때는 아마 동대륙에서 맛있는 차를 구해 왔다며 찾아갔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런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페르딘은 언제나 그렇듯 그녀를 친절하게 맞아 줬다.

하지만 그날, 그는 평소보다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에 얼굴이 달아오를 때쯤 페르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는 에린 경이 칼립스를 죽였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

“당신은 죄 없는 누군가를 죽일 사람이 아니니까요. 적어도 제가 봐 온 에린 경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떤 일을 겪고 있는 건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만약 당신이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제가 언제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에린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 준 건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페르딘, 이번엔 당신이 틀렸어요.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었나 봐요. 레이먼을 그냥 용서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에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페르딘의 생각만큼 착한 사람이었다면 레이먼을 용서했을까?

그가 만약 지금 그녀가 한 일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경멸할까?

페르딘은 너무 착해서, 이런 그녀마저도 용서할지도 몰랐다.

그의 예비 기사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지 않나. 모두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사람들이었다.

에린은 아몬이 자신을 볼 때마다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딱지가 앉았던 상처를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제대로 말을 꺼내지 않곤 했다.

에린은 옆에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멀리 있는 페르딘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야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을 반복적으로 살피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그녀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만약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 같은 일을 행하리라.

페르딘이 그녀를 경멸해도 좋았다. 자비 없는 손속으로 사람들이 그녀를 악녀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미움받는 건 어차피 익숙했으니까.

페르딘과 그의 기사단을 위협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다시 악마가 될 수 있었다.

* * *

조용했던 야영지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야영장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페르딘이 에린을 찾아야 한다고 그들을 깨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린을 찾아낸 곳은 야영지 안이었다.

자연스럽게 천막에서 나오는 에린을 보고 페르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한순간에 사라졌던 에린이 이미 야영지에 도착해 있다니.

그 속도도 속도이지만 그녀는 파혼하자는 파격적인 말을 꺼낸 사람치고 너무 태연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신을 보고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네는 에린을 보며 페르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데렉은 멍하니 있는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분명 에린 리서스랑 무슨 대화 한다고 하지 않았어? 표정이 완전 살벌했었는데……. 게다가 왜 둘이 따로 온 거야? 설마 싸웠어? 그런 거야?”

호들갑을 떠는 데렉의 말에 페르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린이 파혼하자고 했다는 말을 그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면 데렉은 분명 기뻐서 날뛸 테니까.

지금 그에게 싸웠냐고 물어보는 말투에도 은근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아마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게 되면 잘됐다고 말하며 당장 파혼을 하라고 하겠지.

페르딘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데렉을 바라보며 말했다.

“입 다물어, 데렉.”

페르딘의 말에 데렉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페르딘의 눈치를 보며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페르딘은 많이 관대한 편이었지만, 이럴 때 까불면 진짜 큰일 나는 수가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데렉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두 남녀를 바라봤다.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그의 예민한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두 사람이 전혀 티를 내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 * *

다른 이들이 이상함을 느낀 건 아침이 돼서였다.

레이먼이 어제부터 보이지 않았다.

잠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토벌대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보이지 않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카론이 제일 먼저 얘기를 꺼냈다.

“레이먼이 사라졌는데?”

항상 에린 주변을 맴돌았으니, 그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뭐야. 아무 말도 없이 후작 성으로 돌아갔나?”

“찾아봐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그는 상급 기사인걸. 마물도 많지 않은 숲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 거 같지는 않은데…….”

“급한 일이 있었나 보지. 물론 아무 말 없이 토벌대를 떠난 건 처벌받아야겠지만.”

“어쩌면 도망친 걸 수도 있고…… 어쨌거나 지금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레옹 백작님은 약속 시간에 늦는 걸 제일 싫어하신다고.”

레이먼은 토벌대에 속해 있긴 했지만, 굳이 따라올 의무는 없는 자였다.

그는 에린을 보호한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딱 그뿐, 토벌대에 뭔특별한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의 눈에 음습해 보일 정도로 에린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인간 약간 음침했는데 잘된 거 아닐까? 에린 경을 바라보는 모습이 가끔 소름 돋을 정도던데…….”

“맞아.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건 알겠는데 너무 과했지.”

몇몇 토벌대원들은 오히려 레이먼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좋아하기도 했다.

그 속에서 카론만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