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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26화 (26/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26화

* * *

“레이먼.”

레이먼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아까 페르딘 렉시아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에린이 그의 옆에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지? 언제 이동한 거지?’

레이먼은 순간 당황했다. 그가 아까까지만 해도 보고 있던 에린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분명 그는 페르딘과 에린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검술 학부의 애송이들이 기척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그의 경지는 낮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그를 발견하는 건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에린은 분명 페르딘이 붙잡으려는 걸 피하고 도망치지 않았나.

그 모습을 보고, 코렐리아가 저걸 봤으면 재밌어했겠다고 생각한 게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 속도로 그의 옆에 왔다고?

그가 있는 곳이 그들이 있던 곳과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레이먼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기분에 멍하니 에린을 쳐다봤다.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조금은 달라진 듯하긴 했지만, 그의 머릿속의 에린은 여전히 바보 같고 한심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가지고 놀기 딱 좋은 계집애일 뿐인데…… 뭔가 이상했다.

“거기서 뭘 보고 있던 거야? 검까지 뽑고.”

에린의 말대로, 레이먼은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수 있게 발검까지 모두 끝마친 모습이었다.

에린은 천천히 레이먼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녀에게 아까 페르딘과 유약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에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달이 떠서 그런 걸까? 레이먼은 달 아래에서 눈을 빛내는 에린 리서스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도대체 왜?

‘진정해라, 레이먼. 상대는 에린 리서스야. 긴장하는 게 웃긴 거라고.’

그는 이미 상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했고, 눈앞에 있는 에린 리서스는 이제야 검술 학부에서 검을 잡은 애송이였다.

레이먼은 속으로 애써 그녀와의 실력 차를 생각했지만, 그의 몸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굳게 잡은 검이 애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상하네.”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검집에 손을 얹고 발검했다.

“여기서 뭘 하려고 했어? 왜 쥐새끼처럼 숨어서 나와 페르딘 경을 훔쳐본 거야?”

레이먼은 에린을 기절시킨 다음, 코렐리아가 내린 임무를 완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상황을 살피던 중, 마침 페르딘과 에린이 일행들에게서 멀어지길래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거였다.

게다가 이 이상 토벌단을 따라가면 그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곧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레이먼은 에린을 다치게 하고, 그 핑계로 도망치려 했다.

그래, 쉬운 일이었다.

레이먼은 자신의 계획을 떠올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달이 자신을 홀린 게 분명했다.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계집애에게 겁을 먹다니.

누군가가 그의 모습을 봤다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일이었다.

레이먼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채로 천천히 에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에린, 쥐새끼라니……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나는 그냥 네가 페르딘 경과 둘이서만 어디로 가길래 걱정돼서 쫓아간 거야. 아무리 약혼자라도 이 늦은 밤에 깊은 숲에 들어가면 어떻게…….”

“내가 걱정됐다고?”

“그래. 넌 조심성이 너무 없다니까. 그를 너무 믿지 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잖아. 페르딘 경은 나랑 다르니까 조심해야지.”

“그를…… 믿지 말라고…….”

그건 에린이 이제까지 들어 본 말 중에 제일 웃긴 말이었다.

만약 과거에 그녀가 레이먼에게 죽지 않았다면 그의 말을 믿었을 수도 있다.

레이먼은 내 친구니까, 내 편이니까, 하고 생각했을 테지.

그녀가 목숨을 잃은 후에 얻은 것이 있다면, 진짜 믿어야 할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기 직전, 그녀를 지켜 줬던 건 페르딘과 그의 기사단밖에 없었다.

눈앞에 벌레 같은 남자는 감히 그들을 믿으라 말라 할 수 없었다.

“레이먼, 그거 알아? 검이 목에 박히면 아파. 심지어 바로 죽지도 못해서 긴 시간 아픔에 떨다가 죽게 되지…….”

레이먼은 에린을 미친년 보듯 쳐다봤다.

너무 당연한 사실을 무표정하게 말하고 있는 게 괴상하면서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에린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를 다친 게 분명했다.

‘코렐리아가 훈육을 너무 강하게 했나? 그러게 좀 적당히 하라니까 진짜.’

에린에게 자신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단 사실을 들킨 건 의외였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두 달간 그녀를 관찰하며 레이먼은 에린이 이상해졌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놀려 먹기 좋은 순한 눈은 어디 가고 그녀는 항상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레이먼은 에린이 변한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함을 느끼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리 변했어도 그 본질은 에린 리서스였으니까.

아마 얼마 안 가서 다시 그에게 매달리고 애정을 갈구할 게 뻔했다.

아카데미에서도 에린을 사랑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그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저질러도, 그녀가 어떤 말을 해도 에린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평생 코렐리아에게 순종해 온 에린이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레이먼은 매우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봐 왔다.

쓸쓸한 눈으로 후작 성의 탑 안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앉아 있는 에린 리서스.

그 모습이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에린,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이리 와. 내가 야영지로 데려다줄게. 그런 다음 천천히 얘기해 보자.”

레이먼은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대로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킨 다음, 원래의 계획대로 하면 될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 순간 레이먼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에린의 팔을 그러쥐었다.

‘그럼 그렇지.’

그는 허무한 듯 웃었다. 에린의 팔을 붙잡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아까의 기묘한 느낌은 그의 착각이 분명했다.

레이먼은 곧바로 검을 역으로 쥐고 에린의 목 뒤를 가격하려 했다.

일련의 동작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상급 기사도 절대 막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의 검등이 에린을 가격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레이먼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의 검은 에린에게 닿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검만 떨어져 내린 게 아니었다.

그의 눈에 튀어 오른 핏방울들을 검으로 깔끔하게 막아 내는 에린이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검술이었다.

하지만 저 핏방울이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거지……?

레이먼이 멍한 표정으로 그 핏방울을 바라봤다.

‘내 손이……?’

그의 손이 검 옆에 나란히 떨어져 있었다.

레이먼은 순간 머릿속이 마비되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몰려온 뒤였다.

“으읍-!”

레이먼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에린이 그의 입을 틀어막는 게 더 빨랐다.

“레이먼, 난 비겁한 걸 정말로 싫어해.”

그는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손 틈 사이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살…… 살려 줘.”

이미 레이먼의 머릿속엔 에린이 어떻게 그를 제압할 수 있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죽는다.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에린은 지금 레이먼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감추고 있던 소드 마스터 특유의 기세를 조절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가, 충분히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에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결여된 그 얼굴에 레이먼은 섬뜩함을 느꼈다.

“나도 그랬어.”

“뭐……?”

“살려 달라고 애원했어. 네 발치에 매달려서 제발 날 보내 달라고 말했었는데…….”

“…….”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는데…….”

에린의 두 눈에서 작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불쌍한 에린 리서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이 안타까웠다. 그녀는 간절히 살고 싶었다.

“그런데 네가 죽였잖아. 그리고 지금도 내게 똑같은 짓을 하려고 했지.”

만약 그녀가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이곳엔 레이먼이 아닌 그녀가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레이먼은 과거에도 그의 발치에 매달려 애원하는 에린을 아무런 동정심 없이 죽였다.

당신을 정말로 좋아했었는데…….

에린은 그 말은 내뱉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물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어? 후작 부인이 내가 검을 못 들게 만들라고 시키기라도 했어?”

그녀의 말에 레이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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