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25화
그는 누군가가 그녀를 미는 걸 보고 쫓아갔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에린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단 걸 알고 두려움에 떨었고, 사람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지게 되었다.
“에린,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그 호수에서 그녀를 민 것은 레이먼이었고, 그 때문에 평생을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았다는 걸.
레이먼은 과거에 그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고, 끝내 그녀를 죽였다.
그는 그녀의 감정을 비웃으며 재밌어했다.
에린은 동그라미를 그리던 종이 위에 레이먼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가 그녀에게 끔찍한 짓을 했던 것은 맞지만, 그건 과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가지고 그자를 처벌해도 괜찮은가?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지만 고민은 찰나였다. 에린은 자신이 있었다. 레이먼이 과거와 똑같은 짓을 벌일 거라는 자신이.
그리고 오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토벌단이 출발할 것이다.
* * *
아카데미에서 인랑족의 영토인 남부 산맥까지는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왕복으로 한 달은 걸리는 거리였다.
토벌단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만 거의 이 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루 이틀은 체력적으로 괜찮았지만, 닷새가 넘어가자 토벌단의 체력이 현저히 저하됐다.
다들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눈에 띄게 힘들어했다.
카론은 저번 마물 토벌 때와 같이 에린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이번 토벌단에도 릴리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카론은 처음 마물 토벌을 나갈 때보다 긴장을 덜 한 상태였다.
몇 번의 대련을 통해 에린이 얼마나 강한 기사인지 깨달은 것이다.
에린의 말로는 그녀가 엄청난 천재여서 그렇다는데…… 카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서에도 때때로 규격 외의 천재가 나오기도 했다.
‘그게 누님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카론은 제 옆에 있는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에린을 한 번 쳐다보고 주위를 한 번 훑어보다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인상을 썼다.
곰곰이 생각하던 카론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레이먼이랑 싸웠어? 왜 누님에게 다가오지 않는 거야?”
“…….”
“왜? 레이먼은 좋은 사람이잖아.”
카론의 말대로 레이먼과 에린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두 달 동안 에린은 그를 의도적으로 무시했고, 몇 번의 거부를 당한 레이먼은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걸 보면 어떤 꿍꿍이를 포기한 건 아닌 듯했다.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레이먼이 좋은 사람이라는 카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페르딘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카론이 서둘러 그녀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에린은 이번 임무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해야 했다.
레이먼이 거슬리긴 했지만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이번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페르딘이었다.
과거 그는 임무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에린은 인랑족 토벌 임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이 임무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을 하기 꺼렸기 때문이었다.
에린이 페르딘의 옆으로 가는 걸 본 카론은 묘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에린은 페르딘과 약혼을 한 뒤, 의아할 정도로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토벌이 시작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페르딘에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보고 쑥덕일 정도였다.
"둘이 약혼한 사이가 맞긴 했네?"
"아니, 그럼 공녀님은 어떻게 되는 거야? 진짜로 끝난 거야?"
"잘 어울리긴 하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에린 리서스 때문에 두 분이 억지로 헤어진 거잖아. 저건 옳지 않지."
에린에게 반감을 품은 듯한 한 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 학생의 말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 아무리 조용하게 말해도 듣지 못하는 게 더 힘들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에린은 더 확실하게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페르딘을 다시 만난 순간부터 했던 그 결심을 이제는 실행할 때였다.
저녁이 되고, 토벌단은 야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에린은 능숙한 솜씨로 천막 설치를 돕기 시작했다.
카론은 또 ‘아니, 어떻게 이렇게 익숙한 건데?’라고 말하며 투덜거렸다.
분명 야영을 해도 자신이 훨씬 많이 했을 텐데 에린이 그보다 더 능숙해 보였다.
“원래 검이 뛰어나면 다 뛰어나.”
그녀의 말에 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영 준비를 다 끝마치고, 식사도 전부 끝났다. 이제 각자 휴식할 시간이었다.
다들 어느 정도 잠이 든 그 시간, 에린은 페르딘을 찾아갔다.
“페르딘 경.”
편하게 쉬고 있었는지 천막 밖에 앉아 있는 그의 금발이 약간 흐트러져 있는 게 보였다.
에린의 부름에 페르딘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건 그의 옆에 있던 데렉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르딘의 옆에서 육포를 입에 욱여넣고 있던 데렉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손에 있던 육포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데렉은 그대로 눈동자만 굴려 에린을 쳐다봤다.
“할 말이 있어요.”
저거 예전에도 들었던 말인데…….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번엔 페르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르딘 역시 어딘가 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마물 토벌 이후로 에린이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 준 것이다. 그에 왠지 모르게 기쁘면서도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말고,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고 싶어요.”
페르딘은 그녀가 단둘이 얘기하자고 했을 때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에린은 그녀가 마물 토벌에 따라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발언을 내뱉었다.
이번 역시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에린의 말에 데렉이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둘이서…… 조용한 곳?”
하지만 그런 데렉을 에린도, 페르딘도 신경 쓰지 않았다.
페르딘은 어쩐지 에린을 따라가기 싫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을 차마 거절할 순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에린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수십, 수백 번을 연습했던 말이었다. 항상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준비해 오던 일이기도 했다.
그와의 약혼은 후작 부인의 강요로 이루어졌다.
페르딘은 약혼 때문에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음에도 그녀를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이번 생에 만난 공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툭 하면 에린을 찾아와 쉴 새 없이 말을 걸고는 했다.
그사이 공녀가 자신에게 원망의 기색을 내비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에린은 그런 그들을 더는 괴롭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착한 사람들이기에 그녀를 원망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공녀가 자신과 페르딘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한 말 역시 그녀를 위한 선한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파혼해 드릴게요. 대신 이번 임무에서는 저와 계속 함께 있어 주셨으면 해요.”
“파혼……?”
“네. 억지로 싫으신 약혼을 계속하실 필요 없어요.”
페르딘의 얼굴이 굳었다.
에린은 과거에 후작 부인이 무서워 그를 같이 진창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이제 더는 코렐리아가 두렵지 않으니 그를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에린이 두려워하는 건, 그녀의 옆에 있다가 다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모든 걸 끝내기 전까진…… 이 사람을 끌어들일 수 없어.’
그래서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저 역시,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원하지 않았다면…… 왜 저와 약혼하고 싶어 한 겁니까?”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저 잠깐의 변덕이었어요.”
페르딘은 에린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힘들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에게 꺼내는 말투는 무척이나 덤덤했다.
그가 봐 왔던 에린은 항상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페르딘은 에린의 과거를 보고 나서부터 그녀가 계속 눈에 밟혔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들이 서로 알았던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녀가 싫다고 하면 이 약혼을 깨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참 이상한 생각이었다. 그는 원래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세상의 모든 짐을 혼자 지고 있는 사람이 신경 쓰였다.
에린은 빤히 페르딘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에린 경!”
페르딘은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에린이 더 빨랐다. 그녀는 페르딘이 눈으로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그 장소를 벗어났다.
아마 그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그녀를 보고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에린은 페르딘의 말을 더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자신과의 파혼을 좋다고 대답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쥐새끼 한 마리가 따라붙었어.’
먼 곳에서 느껴지는 더러운 기척에 에린은 입매를 비틀었다.
이번 임무에서 페르딘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을 믿기로 했다.
‘멀지 않은 거리라면 페르딘에게 위험이 닥치기 전에 감지해 낼 수 있으니.’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면 괜찮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에린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