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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24화 (24/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24화

어렸을 적의 그도 에린처럼 침대 아래 들어가 몸을 웅크리며 울곤 했었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비참한 감정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에린에게서 그가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의 옆에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해 버틸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를 위하는 많은 사람이 힘이 되어 줬으니까.

페르딘은 그들을 위해 강해질 수 있었고,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본 에린은 항상 혼자였다.

아카데미에 와서 처음 그녀를 본 순간, 페르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 상황을 버티고 있는 거지?’

모든 사람이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물론 표면적으로 드러난 소문들은 에린 리서스가 악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들이 만났던 에린 리서스가 진짜 악인이었나? 정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인가?

물론 페르딘도 에린이 악녀가 아니란 사실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저 어린 시절 울고 있었단 사실만으로 그 사실을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페르딘은 에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진짜 악인인지 아닌지 직접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악인이 아니야.’

그가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죽은 고양이를 묻어 주며 울고 있는 에린을 본 뒤부터였다.

상처 하나 없는 고운 손으로 흙을 덮어 준 뒤, 에린은 고양이를 추모했다.

그리고 페르딘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다.

익숙한 듯 소리를 죽이며 눈물만 흘리는 에린을 보며, 그는 마음속의 무언가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을 제멋대로 해하는 자가 그리 울 수 있다고?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소문들은 무엇인가. 그녀가 겪어야 했던 불합리한 증오와 비난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 건가.

도대체 감히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린 건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페르딘?”

아실리 공작의 말에 페르딘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공작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마물 토벌에서 벌어졌던, 마물 떼가 전부 죽는 일 말이야. 누가 벌인 일인지 아는 게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일반 기사가 해치울 수 있는 마물 떼는 아니었어……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나타난 거 같다는 소문도 있더군.”

“그것에 관해선 저도 모릅니다. 마물 떼를 물리쳐 준 그 사람 덕분에 제가 여기 있다는 것만 알고 있죠.”

“뭐, 그럴 수 있지. 토벌에 함께한 다른 이들도 한번 살펴봐야겠군.”

“토벌대에 있던 사람이 한 일일까요?”

아실리 공작은 페르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끼리는 서로의 수준을 가늠할 수 없게 되지. 그래서 토벌대에 있는 사람을 봐도 확신할 수는 없다. 나도 숨어 있는 그자를 꼭 만나 보고 싶군.”

적수를 찾을 수 없게 된 지 한참 돼서 말이야……. 아실리 공작이 덧붙여 말했다.

제국에 그 외에도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존재하긴 했지만, 공작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을 찾고 싶어 했다.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든 생각에 아실리 공작의 두 눈이 반짝였다.

마침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지 않은가. 에린 리서스를 제자로 삼으면 어떨까?

이런 아카데미에서 검술을 배우는 것보다 그의 밑에서 배우면 훨씬 성취가 빠를 것이다.

아실리 공작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 에린이 자신의 제자 자리를 거절할 거란 생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기사가 그의 제자 자리를 거절하겠는가. 소드 마스터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주어지는 것인데!

공작은 자신을 보고 묵례만 하던 에린이 떠올렸다. 그 오만한 성정 역시 그의 제자가 되기 적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에 공작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생각보다 단순한 남자였다.

‘다음에 아텐츠 아카데미에 다시 오게 된다면 바로 제안해야겠군.’

아실리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페르딘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황제가 곧 네게 임무를 내릴 거 같던데.”

“또 시작이군요.”

“이번엔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닐걸? 인랑족 토벌과 난민 구출을 위해 그들의 영토로 가게 될 거다. 물론 레옹 백작이 이끄는 제2 기사단이 함께한다고는 한데…….”

“…….”

“글쎄. 그만큼 위험한 임무라는 것이니 말이야. 이번에도 열심히 살아남기를 빌지. 혹시 모르지 않나. 이번에도 지나가던 소드 마스터가 도와줄지.”

그 말과 동시에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두 달은 빠르게 지나갔다.

에린은 식탁에 앉은 채, 작은 깃펜을 손에 들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달 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떠올렸다.

에린은 검술 학부 수업에 성실히 참여했다.

그 결과 뛰어난 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위 다섯 명안에 들 수 있었다.

가끔 아카데미 안에서 페르딘과 만나기도 했다. 마주칠 때면 서로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그를 생각하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에린은 자신의 심장 부분을 지그시 짓눌렀다. 그러고는 생각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가끔 공녀가 놀러 와 자신의 일상을 조잘거리기도 했다.

대부분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다. 아니면 어느 가게에 디저트가 맛있는데 자신과 먹으러 가자. 이런 평범한 얘기였다.

또…… 아몬과 대련도 해 줬다.

에린은 종이 위에 아몬 특유의 화난 표정을 그렸다. 그는 별다른 일이 없어도 항상 화난 표정으로 다니곤 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에린은 피하지 않았다.

그 덕에 아몬의 실력은 빠르게 늘었고, 그걸 본 검술 학부 학생들이 자신들과도 대련해 달라고 하여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 소식을 어떻게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카론까지 대련을 청하는 바람에 에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동생과의 대련도 피하지 않았다.

에린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카론은 계속해서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그다음 날부터 그녀를 찾아와 아몬처럼 굴었다. 그러니까, 종일 대련을 해 달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카론을 생각하며 작게 웃던 에린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길을 걷던 중 본의 아니게 검술 학부 학생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난 요즘 어떤 소문도 못 믿겠어. 에린의 소문이 너무 이상하잖아.”

“뭐가?”

“에린은 착하잖아.”

“하긴,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야.”

과거에 알아주길 바란 일이지만 막상 그 말을 듣고도 생각보다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현실감이 없었다.

그리고 레이먼은 그런 에린의 평범한 일상 안에 이물질처럼 끼어 있었다.

잊을 만할 때쯤이면, 검술 연습을 하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모습을 들키곤 했다.

그를 보며 에린은 회귀 후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 그리고 막아야 할 일들. 그리고…… 죽여야 할 이들.

과거의 에린은 벌레 하나 죽이지 못했고, 벌레가 아닌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후작 부인에게 매질을 당할 때도 ‘아파.’, ‘무서워.’ 같은 생각만 했지. 복수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이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는 건 그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래도 당해야만 하는 걸까?

실컷 이용당하다가 폐기 처분 하듯이 버려진다면, 그래도 그 사람을 용서할 것인가?

레이먼이 검술 학부에 오는 일은 과거에도 똑같이 벌어졌었다. 에린 때문에 공녀가 죽었으니, 그녀가 또 사고를 치지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때 에린은 그래도 레이먼이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왔으니 자신의 편이 생겼다고 믿었다.

그리고 레이먼은 그녀의 예상대로, 에린을 만나서 반가워했다. 익숙한 웃음을 그대로 지으면서 똑같이 말했다.

“에린! 오랜만이야.”

하지만 그 이후, 에린은 이유 없는 욕설을 들을 때가 많아졌다.

그녀의 잘못이 아닌데도 찾아와서 그녀에게 화를 내고 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레이먼이 온 이후 에린에게 더 많은 비극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레이먼이 있으니까, 난 괜찮아.’

알면서도 안일한 것이었겠지.

레이먼은 그럴 때마다 에린을 위로했다.

에린은 과거의 이맘때를 떠올렸다.

페르딘은 과거에도 지금과 똑같이 인랑족을 토벌하고 인질로 잡힌 난민들을 구출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하지만 에린은 페르딘이 임무를 완수했는지 그 결과를 바로 알지 못했다. 그녀가 호수에 떨어져 사경을 헤맸기 때문이었다.

레이먼과 함께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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