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23화 (23/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23화

레이먼은 기다렸다는 듯 에린에게 뛰어갔다.

그녀가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검술 학부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간간이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친근해 보이기까지 했다.

‘뭐야, 에린 리서스…… 저렇게도 웃을 줄 알았나?’

그 모습이 레이먼의 배알을 더 뒤틀리게 했다.

“에린, 아까 인사를 제대로 못…….”

레이먼은 그렇게 말하며 습관적으로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의 손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볼을 붉히며 좋아했었다.

그래서 레이먼은 에린이 자신을 거부할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린 리서스는 언제나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였으니까.

짝-

레이먼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에린의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냥 쳐 낸 것도 아니고 꽤 강한 힘을 실어서.

그의 손이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레이먼은 에린에게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몇 달 전에도 에린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그에게 조잘대며 얼굴을 붉혔다.

에린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개처럼 늘 그를 반기고 따랐다.

그렇기에 레이먼은 그녀가 어딘가 변했다고 느꼈다.

그때였다. 에린이 수줍은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땀이 나서 냄새가 날 거야, 레이먼.”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에린 리서스가 변할 리 없어. 레이먼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중얼거렸다.

“……검술 학부에 와서 그런가. 조금 변했구나, 에린.”

“그럴 리가. 너는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거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레이먼은 과거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웃음, 그 손짓, 그리고 쓰레기란 사실까지.

에린은 레이먼에게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 줘서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덕분에 복수하는데 아무런 죄책감도 없을 것 같으니까.

그녀는 속내와 다르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옆에 있던 필립이 놀라서 쳐다볼 만큼, 매혹적인 미소였다.

* * *

“페르딘 렉시아.”

페르딘은 눈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바라봤다.

문을 다 가릴 듯한 큰 덩치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현재 페르딘의 눈앞에 있는 이는 제국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라 불리는 남자였다.

“오랜만입니다, 아실리 공작님.”

황자인 그가 존댓말을 하고, 공작이 말을 낮추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지만 상대는 아실리 공작이었다.

감히 황제가 아니라면 그에게 반말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공작이 페르딘의 어머니와 막역한 사이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사용하던 말투가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아실리 공작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풀어져 있었다.

원래 사나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라 티가 나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를 봐 온 페르딘은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공작의 옆에는 공녀가 조용히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귀찮은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탁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찻잔을 책상 위에 내려놨다.

그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양 있고 예의 있는 공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도 귀엽다는 듯 아실리 공작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팔불출적인 면모에 페르딘은 기가 질린 듯 살짝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그 순간, 공작이 웃고 있던 얼굴을 굳히며 페르딘을 돌아보았다.

“에린 리서스와의 약혼을 순순히 받아들였다지…… 설마 알고 그런 건가? 네 이능이 그녀의 재능을 보여 주었나?”

페르딘이 의아한 듯, 아실리 공작을 바라봤다.

그 표정에 아실리 공작은 그가 에린의 재능을 알지 못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왜?

아실리 공작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페르딘 렉시아는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착해 빠지고 천사 같은 황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달린 수많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는 자였다.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의 사람을 지키고자 앙숙 같은 제 딸과 연애하는 척도 하지 않았나.

공작은 아직도 공녀와 페르딘이 썩은 얼굴로 팔짱 끼던 것을 잊을 수 없었다.

그가 디트리온과 페르딘의 싸움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국은 현재 세 명의 소드 마스터끼리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고 있었고, 그중 둘은 황제의 편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 사이엔 암묵적으로 황실 다툼에 끼어들 수 없다는 법칙이 생겼다.

하지만 자식들의 연애까지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간접적으로 나를 이용한 셈이지.’

그래서 아실리 공작은 에린의 재능을 눈치챈 페르딘이 그녀를 이용하려고 약혼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검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건 그만큼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만약 페르딘이 정말로 그걸 위해 약혼을 유지하는 거라면 공작은 그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미래의 소드 마스터로 유력한 에린 리서스가 하나의 패로 이용당하는 건, 검의 길을 가는 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까.

“왜 에린 리서스를 곁에 두는 거지? 황제가 수작을 부리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대체 그 눈으로 뭘 본 거야?”

렉시아 황가가 지금의 성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진실을 보는 눈.

그 이능을 페르딘 렉시아가 지니고 있었다.

오직 아실리 공작과 공녀, 그리고 소수의 신성 왕국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아마 그 사실을 황제가 알았다면, 당장이라도 페르딘을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원할 때 사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페르딘을 응시했다.

진실을 보는 눈은 이 세계가 알고 있는 진실, 즉 과거의 기억을 무차별적으로 보여 주고는 했다.

페르딘은 그 이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유용한 능력은 맞았기에 공작은 그가 이능을 통해 에린 리서스의 재능을 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페르딘은 공작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페르딘은 에린에게서 어떠한 장면을 보았다.

다만 그건 찬란한 재능도, 행복한 후작가 영애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가 본 건 침대 아래 숨어서 소리가 날까 봐 입을 막고 우는, 작고 초라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지독히도 과거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린 리서스는 후작가의 보물이라고 불리며 사랑받는 레이디였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후작이 너무 싸고돌아서 그녀가 패악을 부리는 악녀가 된 거라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페르딘은 에린이 그처럼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이능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실리 공작은 그 이후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공녀가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인상을 썼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사람은, 숨기고 싶은 일도 있는 법이에요, 아버지. 그게 아픈 기억이라면 더욱더 그렇죠.”

“…….”

“그러니까 그런 일은 직접 말해 주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되는 기억이…… 존재하니까요. 그렇다고 소문으로만 그녀를 판단하지는 마시고요. 마치 남들이 제가 아버지 딸이고 성녀라서 속 편하고 재수 좋은 년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죠.”

공작은 공녀의 말에 쩔쩔매기 시작했다.

아실리 공작을 저렇게 말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잖아요. 전 항상 아파요. 사람들은 아파도 아실리 공작의 딸이 되고 싶다고, 나도 성녀로 태어났다면 팔자 좋게 살겠다고 하지만 전혀 아니에요. 그들은 겉만 보고 자신이 좋을 대로 생각하잖아요.”

“…….”

“그리고…… 전 에린 경이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마치 아버지 같았어요.”

공녀의 말에 페르딘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 덩치 크고 산 만한 아실리 공작과 에린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콧수염도 나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물론 공녀가 외양을 말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그냥 공작과 에린이 닮았다고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에린 경은 제 친구라고요.”

공녀가 거기까지 말하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물론 아직은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지만…….”

페르딘은 오랜만에 공녀가 맞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에린은 악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남의 겉모습과 소문만 듣고 제멋대로 판단하고는 한다.

페르딘 역시 남들이 보기엔 완벽하고 살기 편해 보이는 황자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아버지는 자신을 죽이려 하고 형제는 그를 증오한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