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20화
학부생들 모두 어딘가 들뜬 모습으로 자신을 대했기 때문이다.
“에린, 하마터면 다칠 뻔했다며?”
“갑자기 나타난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토벌대가 전멸할 뻔했다는데, 그게 가능한 건가?”
“몸은 괜찮아? 걷는 게 왜 그래?”
“아몬 경이랑 결투를 해서 이겼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야?”
“그게 어떻게 사실이야? 아몬 경이 어떤 사람인데! 에린이 이겼을 리가 없잖아.”
그녀가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마물 토벌에서 에린이 마물 떼를 상대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던 검술 학부 학생들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이 왠지 오늘 아침 그녀를 바라보던 공녀의 눈빛과 닮아 있어 에린은 소름이 돋았다.
처음에 그녀를 싫어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살갑게 다가오는 학생들의 모습이 마냥 낯설게 느껴졌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아직도 에린을 고깝게 보는 이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아무리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살인자를 저리 좋아하다니.”
“기사의 명예는 어디로 갔는지, 쯧쯧.”
“내버려 둬. 어차피 저런 자는 상급 기사의 문턱에도 도달할 수 없어. 다들 잘 알고 있잖아?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선 정신적인 경지도 극치에 도달해야 한다고. 에린 리서스는 상급 기사도 되지 못할 거야.”
과거였다면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에린은 그들을 무시했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며 연무장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의외의 사람을 보고 인상을 썼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몬이었다.
주위의 검술 학부 학생들이 그를 계속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게 보였다.
미래에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고 유명한 아몬이니, 초급반 학부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대부분에 기사들은 검에 미친 놈들인 만큼 그들의 사고는 ‘검’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아무리 동급생이라도 검술 실력이 뛰어난 아몬 헤도르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에린은 그를 발견하곤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술 학부 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적당히 뛰어난 천재로 행동하는 걸 목표로 삼은 이상 그와 엮이는 걸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린이 피하는 것보다 아몬이 다가오는 게 더 빨랐다.
아몬은 아카데미 기사단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마 에린이 바로 훈련에 나올까 생각했는데 그 설마가 맞았다.
아몬의 얼굴에 불만이 어렸다.
“에린 경, 벌써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오늘 아침에야 정신을 차리셨다고 들었는데요.”
에린은 소름이 돋았다. 아몬 헤도르가 자신에게 존댓말을 한다고?
에린이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서쪽으로 떴나?
하지만 해는 제 위치에 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지?
잠시 이유를 생각해 보던 에린이 곧 결론을 내렸다. 아몬이 마물 토벌 때 머리를 다친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에린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것 역시 그녀가 미래를 바꿔서 벌어진 일일까? 그러면 아몬의 머리를 어떻게 고쳐 줘야 하지?
“움직이는 것도 불편해 보이시는데 조금 쉬다가 나오셨어도 됐을 겁니다.”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듯한 말투인데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에린은 당황한 채 아몬을 바라봤다.
이것 역시 미래와 달라진 일이었다.
아몬 헤도르는 검술 학부에서도 상급반에 진학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에드워드가 가르치는 초급반에 올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첫날에 검술 평가 날을 제외하고는 수업 시간에 초급반과 상급반이 마주칠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그녀의 약혼자인 페르딘만 해도 그 수업 이후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아몬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에드워드의 반인 초급반으로 전과를 했다는 뜻이었다. 대체 왜?
다시 상급반으로 이동을 하려면 아텐츠 아카데미의 전통에 따라 황제가 내주는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과거, 아몬 헤도르가 어떤 개고생을 하며 상급반으로 진학했는지 알고 있는 에린은 그가 왜 초급반에 온 건지 그 이유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게다가 초급반과 상급반은 수준 차이가 심했다.
아몬의 수준이 너무 높아 초급반의 학부생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건 상급반에서도 별 다를 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수련하기 위해선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반에 있는 게 좋을 텐데.
“왜 여기 계신 거죠?”
에린의 질문에 아몬은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녀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나으시면…… 대련,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아닙니다.”
말을 꺼내던 아몬은 에린의 몸 상태를 깨닫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례한 부탁을 한 게 부끄러웠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에린은 오늘 아침에야 깨어난 사람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아몬은 그녀의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열렬한 시선에 에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들은 이래서 상대하기 껄끄럽다. 아무래도 아몬 헤도르를 상대할 때 너무 진심으로 상대해 준 것 같았다.
적당히 봐주면서 이겨야 했나.
하지만 언제나 그 ‘적당히’가 참 어려웠다. 게다가 에린은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들에게 항상 약했다.
강함을 추구하는 기사다운 눈.
한때 누구보다 기사가 되고 싶어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간절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결투 이후 아몬은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투를 통해 강해질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 그는 그 갈증을 해소하고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 테다.
‘저렇게 원하는데 해 줘야겠지.’
에린이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몸이 나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아몬이 원하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으니, 확실하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적당히 하면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겠지.’
어느 정도 대등하게 싸우면 되지 않을까? 너무 압도하지만 않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린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몬과 대등하게 대련하는 이상 이미 평범하게 검술 학부 생활을 하는 건 물 건너간 일이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에린 역시 아몬과 검을 나누는 게 싫지 않았다.
가능성이 있는 천재를 이끌어 주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지금 대련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몬 경.”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꺼냈다.
* * *
로널드 아실리.
그는 이름보다 아실리 공작이라고 더 많이 불리곤 했다.
거대한 렉시아 제국에 단 셋밖에 없다는 소드 마스터 중 한 명. 검의 극의를 이뤄 모든 기사의 존경을 받는 자.
그러나 어떤 수식어로도 그를 다 표현해 내지는 못하리라.
그런 그의 발걸음이 바빴다.
육중한 덩치를 가진 그의 등 뒤로 수많은 기사가 따라붙었다. 아실리 공작이 이끄는 제국의 제1 기사단이었다.
제1 기사단에 속한 기사는 대부분이 상급 기사로,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로 마물이 활개 치는 남부 산맥 근처를 지키는, 제국 내에서 정예 중의 정예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기사단이었다.
그렇기에 아텐츠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검술 학부 학생들이 제1 기사단에 가고 싶어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실리 공작의 옆으로 그의 수석 기사가 접근했다. 그는 얼마 전 아실리 공작이 맡긴 임무를 마치고 이제 막 도착한 참이었다.
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는 행위는 기사로서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예의였다.
“다행히 공녀님께서는 다친 곳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도 알아 왔나?”
“네?”
“상급 마물이 섞인 마물 떼를 경도 상대해 보지 않았나. 아텐츠 아카데미의 토벌대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그게 지나가던 소드 마스터가…….”
기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실리 공작의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기사의 숨통을 조여 왔다.
“헛소리하지 마라.”
이윽고 나온 그의 한마디에 기사단 전체가 경직됐다.
아실리 공작의 앞에 서 있는 수석 기사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수석 기사는 상급 마물 떼를 만난 것보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더 두렵게 느껴졌다.
“소드 마스터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경은 알고 있나?”
“…….”
“감히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가 마스터에 대해 떠드는 만용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라.”
그 말과 동시에 아실리 공작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손에 옅은 마나가 맺히는 게 기사들의 눈에도 보였다.
긴장되는 순간에도 몇몇 기사들은 그 경이로운 광경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들이 원하는 경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검이 아닌 신체에도 마나를 씌우는 경지.
검 하나로 산을 가르고, 상급 마물 떼를 단신으로 해치울 만큼 인간의 경지에서 벗어난 자들.
기사들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수석 기사도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눈치챘다.
언뜻 보면 오만한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기사 중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실리 공작은 충분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그렇게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수십 번의 사선을 넘나들고 수많은 마물을 베어 넘겨야만 도달할 수 있지. 그만한 자면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을 터.”
아실리 공작의 말대로 역대 소드 마스터들은 모두 본인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그전부터 이름을 떨치게 됐다.
그러니 만약 진짜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등장했다면 그들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이 부근으로 움직인 소드 마스터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마물 떼를 상대한 자는 누구인가.
아실리 공작이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의 정면을 바라봤다.
아텐츠 아카데미.
원래라면 한 달 후에나 방문할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