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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6화 (16/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6화

온몸이 무거웠다. 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로 무리를 한 다음 비를 맞아서 그런 것 같았다.

‘기분도 나빠.’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언가를 죽인다는 감각은 언제 겪어도 싫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 더러운 감각에 익숙해진 듯, 그녀는 무언가를 죽일 때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과거의 그녀는 벌레 한 마리도 죽이기 힘들어하던 소녀였다.

가끔 먹는 케이크와 리서스 후작이 선물해 주는 드레스 그리고 꽃을 좋아하던, 불행하지만 평범한 후작가 영애였다.

그렇지만 그 에린 리서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이지 않으면 그녀가 죽게 될 테니까.

에린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토벌대가 멀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살아 있는 아실리 공녀와 카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페르딘도 있겠지…….

‘기다린다고?’

에린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토벌대로 돌아가는 게 옳은 선택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들이 과연 그녀를 기다릴까?

에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피와 마물의 피가 뒤섞여 새빨개진 손바닥이 보였다.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원들은 그녀를 싫어하지만 모두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과거의 그녀는 진작에 죽었을 게 분명했다.

에린은 머릿속으로 자신을 지키려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공녀가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미래도 바뀌지 않을까?

만약 에린 리서스란 사람이 이곳에서 마물로 죽은 게 된다면…… 그렇다면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페르딘이 그녀 때문에 곤란해질 미래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녀만 없다면…… 모두 행복해질 수도 있다.

‘아니야. 아직 바꿔야 할 일이…….’

아직 바꿔야 하는 일이 많았다.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바꿔야 할 일이 많다는 건 변명인 게 아닐까. 그저 그 안에 함께 속해 있고 싶은 마음에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전생에서 그녀는 항상 외로웠다.

페르딘과 약혼을 해 그들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었지만, 항상 제 존재가 이물질이란 건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해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기 일쑤였고, 페르딘의 명예만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줄곧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의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고 싶었다.

“에린 경……?”

에린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페르딘이 그곳에 있었다.

호수의 심연같이 짙고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린은 숨을 삼켰다.

소드 마스터 특유의 민감한 감각으로 누군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페르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에린이 걸음을 멈춘 채 페르딘을 빤히 쳐다봤다. 어째서인지 그는 혼자였다.

어딘가를 급하게 가던 중이었는지 땀범벅이 된 채, 믿기지 않는단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급박한 숨소리로 그가 얼마나 서둘렀는지 알 수 있었다.

공녀님을 돌보느라 바빴던 걸까?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이게 대체…….”

페르딘의 말에 에린은 지금 자신의 꼴이 어떤지 떠올렸다.

비를 맞은 페르딘의 금발이 힘을 잃고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온통 피로 범벅되었을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형편없을 게 뻔했다.

평범한 사람이 마물 떼를 상대하면서 손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살아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었다.

그렇기에 에린은 고의적으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페르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마치 살인귀와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건 다른 일이었다.

에린이 사념에 잠겨 있을 때 페르딘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의 눈에 크게 찢어진 상처와 붉게 남아 있는 흔적들이 보였다.

그에 페르딘은 자신의 옷을 벗어 피로 물든 그녀의 몸을 조심히 감싸 안았다.

에린은 의문이 섞인 얼굴로 페르딘을 올려다봤다. 거친 페르딘의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대체 왜……?

그녀는 전생에 이 남자를 죽게 만들었다.

자신이 계속 그 옆에 있다면 오늘 같은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시련이 계속해서 닥칠 게 분명했다.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

“잘해 주지 마세요.”

에린이 그렇게 말하자 페르딘의 두 눈이 크게 뜨이는 게 보였다.

“저를 그냥 미워하세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에린은 차마 내뱉지 못한 그 말을 그대로 삼켰다.

항상 말하고 싶었다. 나를 비난했다면 당신은 살아남았을 거라고.

그는 남들처럼 그녀를 비겁하다고 욕하고, 악녀라고 경멸해야 했다. 그랬다면 예정되어 있었던 미래를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젠 달라지겠지.’

공녀가 살아남았으니 페르딘은 이제 그녀와 행복해질 것이다.

이제 그녀만 모든 일을 끝마치고 사라지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겠지.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페르딘과 단둘이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 싫었다.

그 일로 인해서 그가 피해를 입을 약간의 가능성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보다 몸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과거의 몸뚱이는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도 한계에 다다랐다.

몇 걸음 내디딘 에린은 자신의 몸이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지금은 안 되는데…….’

지금의 몸은 전생의 경지를 담아내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땅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몸이 쓰러지고 있다고 하는 게 맞았다.

‘일어나면 아프겠네.’

그 생각을 끝으로 에린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리서스 후작가의 성.

견고한 성문은 적의 침입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거대했고 그 안에 있는 기사들의 기세 역시 대단했다.

일개 후작이 가지기엔 강력한 이 병력은 리서스 후작이 평생을 국경을 지키며 쌓아 올린 것이었다.

후작 부인은 그곳에서 여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리서스 후작은 국경을 지키느라 후작성에 잘 들르지 못했고, 카론 역시 훈련하느라 바빠 집안일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탓에 후작이 쌓아 올린 권력은 그대로 후작 부인의 것이 됐다.

후작 부인, 코렐리아는 후작성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멍청한 이들이지.’

그녀는 바보같이 착한 후작가 사람들을 떠올리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이대로만 가면 전부 계획대로 될 게 분명했다.

그녀는 곧 후작성으로 달려올 전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가져다주는 소식은 그녀에게 작은 즐거움을 줄 것이다.

“레이먼.”

코렐리아의 부름에 방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움직였다.

평범한 사람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얼마 전에 레켄 경이 가져온 소식, 제대로 알아봤어?”

“네, 상단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말로는 에린 리서스가 정말로 검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능숙해 보였다고 말하더군요.”

코렐리아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가능한 일이야?”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죠.”

“내가 그것이 검을 들지 못하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도 알잖아?”

코렐리아 리서스.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리서스 후작보다 강한 상급 기사로, 실력을 숨긴 채 십몇 년간 후작 부인으로 살아왔다.

코렐리아가 굳은살 하나 없이 말끔한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흑마법으로 숨기고 있는 손의 본래 모습은 흉과 굳은살이 가득한 기사의 손이었다.

그녀는 에린이 처음 검을 잡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입이 열 개라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상급 기사인 코렐리아는 에린이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 그녀의 재능을 알아봤다.

이번 대에 ‘검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카론 리서스가 아니라 에린 리서스였다.

천재들은 처음 검을 잡을 때부터 달랐다. 에린 리서스는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기사들의 모습만을 보고 리서스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작은 몸이 그리는 검로가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다.

코렐리아는 그 작은 소녀의 재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다행이었지.’

코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눈을 떠올렸다.

“어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물어보며 자신에게 매달리던 소녀를 그녀는 차갑게 뿌리쳤다.

거기서 끝내지 않고 에린이 검을 들 수 없게 만든 것도 코렐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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