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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4화 (14/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4화

어렸을 적, 후작 부인의 훈육이 끝날 때마다 에린은 항상 상상에 빠지곤 했다.

후작성의 첨탑에서 몸을 말고 기다리고 있으면 백마 탄 왕자님이 자신을 구해 주러 올 거라고.

‘그러면 이 아픔도 끝날 테고,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줄곧 기다려 왔다. 기다리면 누군가가 나를 구해 줄 거라는 희망에 부푼 채로.

하지만 그건 상상에 불과했다.

현실은 언제나 더 잔혹해서 마냥 기다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는 현대에서 봤던 소설 속에서처럼 결국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되는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

기다리고 버티며 주인공이 되길 바랐던 소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악녀가 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그녀를 악녀라 부르고 손가락질했지만 에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랐다.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이곳에 있는 나를 제대로 봐 달라고.

나는, 악녀가 아니라고.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기보다 스스로 쟁취해야 했음을 그땐 알지 못했다.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몬의 맑은 두 눈을 바라봤다.

과거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페르딘이 죽고, 후작 부인이 그녀를 처단하려 할 때였다.

아몬 헤도르는 페르딘의 부탁을 받아 그녀를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다.

“빌어먹을…… 에린 리서스, 넌 있어 봤자 방해만 되니까 도망쳐!”

마지막까지 좋은 말은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그녀에게 건네는 말투는 무척이나 상냥했다. 에린은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더욱 저 다정함에 취하면 안 된다. 그 결과가 어떤지 전생에서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나.

두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역시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아몬 경,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에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몬의 손이 갈 길을 잃고 허공을 배회했다.

“쓸데없는 거라니…… 넌……!”

“공녀님과 먼저 돌아가세요.”

“뭐?”

“제가 두 분이 도망칠 시간을 벌게요.”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에린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는?”

“공녀님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 아까부터 이상했는데,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요.”

“그럼 네가 공녀님과 도망쳐.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전 공녀님을 업고 아몬 경처럼 빠르게 뛸 수 없어요.”

에린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팔을 두어 번 흔들었다.

이 얇은 팔목을 보라는 듯한 몸짓에 아몬은 어이가 없었다. 저 팔로 자신의 검을 손쉽게 막아 내고 도리어 그를 압도하지 않았나.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마물 떼는 제가 상대할 겁니다.”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공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에린은 한때 소설 속의 악녀가 그녀라면 주인공은 공녀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아실리 공녀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존재였으니까.

비록 성녀가 된 이후로 이름을 빼앗기고 항상 아팠지만, 저보다는 행복할 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 그녀를 에린은 이번 생에 절대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공녀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페르딘과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녀는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에린은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왜지? 모든 게 잘 되고 있는데.’

그녀가 처음 이곳에서 눈을 뜨고 나서 그에게 모든 걸 돌려주겠다고 생각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공녀도 페르딘도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감겨 있던 공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녀는 무력한 눈으로 에린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과거의 자신 같아 보여 에린은 공녀의 두 손을 잡고, 작게 속삭였다.

“지켜 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과거의 그녀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말한 에린은 아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생에 그가 했던 말을 똑같이 돌려줄 때였다.

“당신은 이곳에 있어 봤자 방해만 되니까 도망쳐요.”

* * *

아몬은 달렸다. 그의 등 뒤에서 공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절대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그의 말에도 에린 리서스는 단호했다.

“저는 공녀님을 업을 힘이 없는데 아몬 경이 저를 두고 가지 않는다면 공녀님은 어떻게 하죠?”

그녀는 절대로 공녀를 업고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도리어 아몬에게 공녀를 방치할 거냐고 힐난하는 말투가 사나웠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같이 죽을 것이냐 아니면 공녀를 살리기 위해 에린 리서스를 버리고 갈 것이냐.

어떤 선택을 하든 기사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진 에린의 말에 아몬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명예를 지키는 일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겁니다. 당신의 명예를 위해 공녀님을 죽이지 마세요. 무엇보다 전, 죽지 않아요.”

지금 죽을 순 없거든요, 하고 끝에 붙인 그 한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이제 곧 토벌대가 있는 곳에 도착할 거였다. 이미 사람의 인기척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소식이 없는 그들을 찾기 위해 페르딘이 기사들을 보낸 게 분명했다.

‘젠장, 더 빨리!’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가 야속했다.

아몬은 지난날, 체력 훈련을 게을리한 걸 후회했다.

조금 더, 열심히 했다면…… 그렇다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에린 리서스와 조금 더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리고 있는 아몬의 두 눈가가 떨렸다. 늦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가 늦는 바람에 마물 떼를 혼자 상대하던 에린의 체력이 바닥나 죽게 된다면…….

아몬의 머릿속에 그녀가 휘두르던 검이 떠올랐다.

그를 쉴 새 없이 몰아붙이면서도, 간결하기 짝이 없는 검술이었다.

아몬이 알던 정석적인 움직임이 그녀에겐 없었다.

찌르고, 베고, 그리고 막는다. 그 간결한 동작들이 합쳐져 하나의 검이 됐다.

그녀의 검로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있는 힘껏 달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에린이 펼치던 검이 머릿속에 반복되고 있었다.

과연 에린 리서스는 그가 아는 소문 속 악녀가 맞는 걸까.

등의 상처와 검이 맞부딪치던 아름다운 순간, 그 검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된다면…….

아몬의 생각이 끊어졌다.

그의 눈앞에 검을 든 채 매서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카론 리서스가 보였다.

“아몬 헤도르!”

그의 옆에는 페르딘과 데렉, 릴리아가 함께 있었다.

릴리아는 바로 가까이 달려와 등 뒤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땅에 깔았다.

그러자 아몬은 등 뒤에 업고 있던 공녀를 조심히 그 망토 위에 눕혔다.

릴리아는 재빨리 마법을 펼쳐 공녀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카론이 아몬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몬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왜…… 당신이랑 공녀님 둘뿐이야.”

“…….”

“에린은 어디 있냐고!”

아몬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은 그와 실랑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달빛을 받은 마물들은 더 강력해진다. 에린 리서스가 강력해진 마물들에게 당하기 전에 서둘러야만 했다.

아몬이 페르딘을 향해 말했다.

“지원이 필요해.”

“…….”

“에린 리서스가 혼자서 마물 떼를 상대하고 있어.”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페르딘의 얼굴은 무섭게 굳었고, 릴리아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데렉은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연신 귀를 두드렸다. 그러나 이내 사실이라는 걸 깨닫고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에린 리서스가 혼자서 마물 떼를 상대한다고……?

릴리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그 말이 내게는 자살하러 들어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 여잔 그렇게 쉽게 죽어선 안 되는…….”

“릴리아, 함부로 말하지 마.”

페르딘의 경고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웬만한 일에 화를 내지 않는 페르딘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카론이 아몬에게 달려와 그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설마…… 너 살겠다고 누님을 버리고 온 거야? 네놈이 그러고도 기사야! 명예도 모르는 자식!”

아몬은 순간, 자신이 에린에게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명예도 모르는 자.

에린 리서스가 과연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었을까.

아몬은 이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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