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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1화 (11/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화

에린을 보는 공녀의 안색이 어두웠다. 그녀는 에린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지만 에린이 그를 깨닫기도 전에, 공녀가 아몬에게 말을 건넸다.

“아몬 경,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도 같네요.”

“네?”

“대신 참관인은 저만 있는 거로 해도 괜찮을까요?”

아실리 공녀의 말에 반응한 건 페르딘과 카론이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안 된다고 외치기 위해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이어진 에린의 행동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공녀님의 뜻이 그렇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에린의 말에 정적이 맴돌았다. 기사 둘의 의견이 같았고, 성녀가 참관인을 해 주기로 했다.

이제 에린과 아몬의 결투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 * *

아몬은 대체 공녀가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실리 공녀나 페르딘이나 가끔 그의 상식을 벗어나는 기행을 벌이고는 했다.

평소의 아실리 공녀라면 고리타분한 말을 하며 그의 행동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그녀의 인자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에린 리서스가 그와 결투를 하면 어떤 꼴이 될지 뻔히 보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참관한다고 말함으로써 일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아무리 자애로운 아실리 공녀라도 자신의 연인을 가로챈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단 뜻일까?

공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도대체 에린 리서스는 무슨 생각으로 그와의 결투에 응한 거지?

갖가지 생각이 가득 들어차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금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카론이 당장이라도 난리를 치려고 흉흉한 기색을 내비치는 걸 에린이 막았다.

그녀가 카론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이자마자 그 망아지 같은 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몬은 자신의 앞에서 걸어가는 에린을 가느다란 눈으로 쳐다봤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 사실 에린의 말대로 그는 에린 리서스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에린과 페르딘이 약혼한 뒤, 카론 리서스가 그들의 예비 기사단에 합류했다.

그것도 모자라 페르딘은 에린 리서스에게 이유 모를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투 도중 그녀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페르딘 녀석, 원래는 냉정한 녀석이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건지.’

평소 시류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 페르딘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그도 알고 있었다.

페르딘이 에린 리서스에게 친절하게 구는 건,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몬이 그렇게 생각하며 에린을 노려봤다. 페르딘을 위해서라도 오늘 에린 리서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했다.

“이쯤이면 될 거 같아요.”

공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몬과 에린이 걸음을 멈췄다.

먼 길이 아니었음에도 공녀는 약간 숨이 차 보였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잠시 숨을 골랐다.

“약소하게 진행하겠습니다.”

공녀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정갈히 모았다.

아몬이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의 칼날이 에린을 향해 곱게 뻗어졌다.

올곧은 검은 그의 성정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사. 그게 바로 아몬 헤도르였다.

에린은 그가 얼마나 정의로운 사람인지 알고 있다.

그는 매사에 관심 없고 게을러 보이지만, 악인을 보면 불같이 달려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그에게 에린은 누구보다 악인에 가까운 사람이었을 테니.

이 외에도 아몬은 일찍이 천재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에린은 짧은 사이에 아몬의 신체를 살폈다.

그의 육체는 검술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헤도르 공작은 소드 마스터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기사였고, 자신의 자식을 소드 마스터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 왔다.

에린은 미래에 아몬이 얼마나 뛰어난 기사가 되는지 알고 있다.

훗날 그는 페르딘의 오른팔로 불리며 천여 마리에 달하는 상급 마물의 목을 베어 내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미래에 아몬은 자신의 천재성 안에 갇혀 버린다.

노력하지 않아도 강하다는 생각에 더는 노력하지 않았고, 결국 그대로 정체되고 만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마스터가 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한다.

아마 그에게 조금의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혹은 조금만 더 열정이 있었다면 충분히 마스터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아몬의 발검을 본 후, 에린 역시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 힘없는 동작에 아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혹시나 했지만 에린 리서스는 형편없는 인간이 확실했다.

공녀가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에린 리서스, 아몬 헤도르.”

그 호명과 동시에 에린이 검을 들어 아몬을 겨눴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닥친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

그가 천재성에 갇히기 전에 에린은 새로운 깨우침을 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천재로 태어났다 한들, 그 위에 또 다른 천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 * *

“신성한 결투를 시작합니다.”

아실리 공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몬이 움직였다. 그는 에린과의 결투를 쉽게 생각했다.

에린 리서스와는 이전에도 몇 번 본 적 있었다. 주로 마주친 건 파티장에서였다.

이름난 패악질과는 다르게 그녀는 매우 조용한 사람이었다.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가만히 서 있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저 사람 보여? 에린 리서스가 이번에 또 사용인을 괴롭혔대.”

“리서스 후작의 딸이 아니었다면 진작 감옥에 갇혔을 텐데.”

“후작 부인이 골치 아파하고 있단 말이 많아. 착한 성품에 사용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는 게 힘들 테지.”

다른 귀족들이 에린을 보고 속삭이는 말에 그 역시 잠깐 관심을 둔 적이 있었다.

파티장에서 그녀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몬은 그 모습이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반성하는 척조차, 힘 있는 사람 앞에서만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파티장같이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아무것도 못 할 거면서 음지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녀.

그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에린 리서스란 사람이었다.

패악은 본인이 부리면서 그 잘못으로 인해 돌아오는 비난에 마치 비운의 여인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에린 리서스가 싫어졌다.

그녀를 더 싫어하게 된 건 릴리아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릴리아는 아몬이 봤던 마법사 중 가장 명예로운 자였다.

함께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으로 활동하면서 그녀의 오라버니가 에린 리서스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몬은 파티장에서 봤던 에린의 손을 기억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던 손은 고난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에린 리서스는 리서스 후작의 딸로 평생을 고생 없이 자라 왔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꾸지람조차 들어 본 적 없어서 저렇게 오만하고 사악한 게 분명했다.

아몬이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왜?

아몬은 검을 휘둘렀다. 그는 헤도르 공작에게서 손수 지도받은 검으로 에린과 부딪혔다.

헤도르 공작가의 정수가 담긴 검은 빠르고, 정직했다. 꾸밈을 모르는 그의 검술은 화려하진 않지만 우아했다.

귀족적인 검술의 최종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헤도르 공작도 인정한 검이었다.

“너는 나를 뛰어넘을 재능을 가졌구나.”

아몬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의 또래에 아몬의 검을 받아 낼 적수는 없었다.

그와 어느 정도 대등하게 맞서는 이는 있어도, 그를 능가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카론도 노력 끝에 이루는 성취를 아몬은 적당한 수련만으로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꾸준히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몬은 지금 이 순간 거대한 산을 마주했다.

에린은 그의 검을 손쉽게 피하고, 오히려 반격해 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아몬의 검이 에린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그의 의도대로였다면 검이 빗나가서는 안 됐다. 아몬은 스스로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원래 그의 목적은 에린 리서스를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겁을 주고 검술 학부를 떠나게 할 생각이었다.

주제를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생 곱게 자라 온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려 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비웃듯 에린 리서스는 아몬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몬의 검에 살의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알고 있었다.

그의 검이 에린의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할 거란 사실을.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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