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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0화 (10/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0화

에린은 이전 생에서 페르딘의 기사단원 중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아니, 인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항상 에린을 증오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아몬과 릴리아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기사단원들 모두가 그녀를 증오했고, 죽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페르딘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에린은 이번엔 절대로 그들의 충성심을 뒤흔들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차라리 온전히 자신만을 증오하길 바랐다.

“기사라는 사람이 입만 살았군요.”

에린의 뒤에 있던 카론은 그녀의 말에 놀라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카론이 아몬을 자극한 건, 그와 싸웠을 때 쉽사리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에린은 달랐다.

만약 아몬이 그녀에게 결투라도 하자고 한다면 에린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카론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에린도 한 명의 예비 기사가 되었으니 자신이 결투를 방해하거나 대신하기는 어려울 거였다.

하지만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카론의 손을 손쉽게 피했다.

그러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순식간에 그의 손을 붙잡았다.

카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린이 어떻게 자신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던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그의 손을 잡는 움직임조차 전혀 읽어 내지 못했다.

다른 기사들 역시 에린의 움직임을 보고 위화감을 느낀 듯했다. 몇몇 기사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움직임 봤어?”

“봤어.”

“진짜? 난 전혀 안 보였는데.”

“뭐, 특별한 것도 없던데. 저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어.”

그들의 대화가 끊긴 건, 에린을 향해 아몬이 짙은 살기를 뿜어내면서부터였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에린에게 말을 꺼냈다.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사나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너…… 죽고 싶구나?”

* * *

죽고 싶냐고 묻는 아몬의 말에 에린은 그런 적도 있었노라 대답하고 싶었다.

과거 릴리아가 그녀를 죽이고자 했을 때 모든 이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죽기를 바랐다.

만약 이것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이 사라진다면 기꺼이 그녀의 목숨을 바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릴리아를 향한 기만이었다. 에린의 죽음은 결코 그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는 꼭 살아남을 생각이다.

진창을 구르더라도 살아남아 칼립스를 죽인 사람에게 복수하고 릴리아에게 진실을 말해 주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페르딘이 그녀로 인해 잃었던 것들을 되찾고, 릴리아가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자신을 증오한다면 그녀의 손에 생을 마감하거나 홀연히 떠날 것이다.

칼립스가 그녀 때문에 죽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세 번의 죽음을 겪었다.

그렇기에 에린은 ‘죽고 싶냐’는 아몬의 말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에 격하게 반응한 건 오히려 카론이었다.

그는 아몬을 향해 살기를 띠기 시작하며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발검을 하려고 했다.

옆에 있는 기사들마저 긴장할 정도의 살기였다.

에린은 카론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그녀는 카론을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앞을 응시했다.

아몬은 여전히 경멸 어린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몬 경, 죽인다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에린이 그렇게 말하며 아몬과 눈을 마주쳤다.

아몬의 눈 안에 마치 용암이 있는 것 같았다. 끓어오르는 눈이 그녀를 태울 듯이 빛나고 있었다.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할 거라면 더욱더 그렇죠.”

에린의 말에 아몬은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건가?”

살인은 큰 범죄다.

하지만 그게 명예로운 결투 안에 이뤄진 결과라면 절대로 죄가 아니었다.

그 뜻은, 결투 도중에 그녀가 죽더라도 리서스 후작가는 그에게 아무런 죗값도 묻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린은 아몬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기사는 말로 싸우지 않습니다. 저에게 불만이 있다면 검을 드세요.”

그렇게 말하는 에린의 두 눈은 강직한 빛을 띠었다.

마치 진짜로 기사라도 된 듯 말하는 모습에 아몬은 속이 뒤틀렸다.

살인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기사를 운운하는가. 명예를 모르는 자는 기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에린 리서스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기사에서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몬은 에린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죽여 줄 용의가 있었다.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그녀는 지금 오만한 선택을 한 것이다.

만약 검술 학부로 전과한 후에 그녀가 스스로를 예비 기사라고 칭하지 않았다면 아몬도 참을 수 있었다.

기사가 될 자로서 아무리 악한 자라도 일반인에게 칼을 들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에린은 계속 아몬의 신경 줄을 건드렸다. 마치 진짜 기사라도 되는 듯한 그 고고한 눈빛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인자면서 왜 아닌 척 군단 말인가. 아몬은 검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기사로 여겨 주길 원한다면, 마땅히 그리하겠노라고.

“그렇게 죽길 원하는 거면 지금 당장 죽여 주지.”

에린과 아몬에게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건 안 돼요.”

그 순간, 갑작스럽게 들려온 작지만 올곧은 목소리에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린 역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아실리 공녀가 있었다.

긴 금발을 한쪽으로 넘긴 청아한 얼굴의 미인이었다.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존재. 렉시아 제국의 성녀. 그리고 페르딘의 연인이었던 사람.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분위기가 급변했다. 공녀는 존재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달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실리 공녀에게 제일 먼저 다가간 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데렉이었다.

그는 다소 창백해 보이는 안색의 공녀를 부축했다.

몸 안에 넘치는 신성력 때문에 공녀는 자주 아프곤 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도 매년 마물 토벌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장차 렉시아 제국을 이끌어 갈 성녀이기 때문이었다.

“공녀님, 날도 추운데 왜 나오셨어요.”

데렉의 말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소란이 있는 듯하여 나와 봤습니다.”

아실리 공녀는 조용해진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런 공녀에게 아몬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공녀님, 왜 지금 결투를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조금 제멋대로인 면이 있는 아몬도 아실리 공녀에겐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건…….”

천천히 입을 떼던 아실리 공녀는 고개를 돌리다 에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두 동공이 빛났다가 빠르게 수축했다.

에린은 전생에서 아실리 공녀와 직접 대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마차에 들어간 채 나오지 않았고 에린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한 적도 있었다.

그 후엔, 공녀가 마물 토벌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니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한마디로 에린은 과거와 이번 생을 통틀어 그녀를 만나는 게 처음이었다.

저런 사람이구나.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실리 공녀를 바라봤다.

과연 페르딘과 연인이 될 법한 사람이었다.

공녀의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에린을 더욱 증오하게 됐다.

에린은 아직도 공녀가 죽고 그녀에게 찾아온 아실리 공작을 잊지 못했다.

냉정한 얼굴의 소유자던 그가 지독히도 화가 난 모습으로 자신에게 외치던 그 순간을.

“네가…… 네가 죽인 거다.”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이가 감히 기사가 되겠다고 말한 결과겠지. 에린 리서스, 네가 한 짓이 어떤 결과로 돌아왔는지 똑바로 봐라!”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게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의 죄가 없게 되는 걸까?

힘이 없고 약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분노가 사그라들었을까?

몇 번의 삶을 거치면서 에린은 항상 의문을 가졌다.

페르딘은 아실리 공녀를 선택하지 않고 그녀의 목숨을 선택했다.

만약 마물 떼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그가 공녀를 지키고자 했으면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에린은 아실리 공작의 분노를 이해했다.

과거를 생각하니 다시 돌아온 삶에서도 아실리 공녀를 만나는 게 조금 껄끄럽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게 할 거니까.’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춤에 매인 자신의 검을 매만졌다.

“왜 당신을……?”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에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에린은 아실리 공녀가 페르딘과 헤어진 일로 자신을 비난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에린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데렉의 부축을 받고 있던 아실리 공녀가 뛸 듯이 에린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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