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7화
릴리아의 오라비는 에린의 전담 시종으로 일했었다. 에린은 그저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고, 그날 릴리아는 하나뿐인 가족을 잃게 됐다.
카론은 릴리아가 어떤 심정으로 마법을 배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도 가족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복수하기 위해 온 인생을 바쳤을 테니까.
카론은 머리가 점점 아파 와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릴리아는 평민이지만 마탑이 주시하는 걸출한 마법사였다.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데려가겠다는 왕국이 줄을 서 있을 정도였다.
어떤 왕국의 마탑에서는 마탑주의 제자로 삼겠다는 제안도 했다고 들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절대로 누님이 마물 토벌에 가는 일은 없어야 해.’
그는 릴리아를 쳐다보며 다짐했다.
하지만 카론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오늘 그의 운수가 지나칠 정도로 나쁘다는 것이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페르딘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데렉이 기쁜 듯 달려 나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페르딘의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그러면서 의아하다는 듯 페르딘을 쳐다봤다.
그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으리라.
에린 리서스.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 안 좋은 말이 오간 게 분명했다.
데렉은 예상이 간다는 듯 인상을 썼다.
에린이 패악을 부린 게 분명했다. 대체 어떤 말을 했길래 페르딘의 기분이 상한 건지.
“에린 리서스가 뭐라고 했어?”
데렉의 말에 페르딘의 입매가 굳었다. 하지만 어차피 모두에게 전해야 할 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번 마물 토벌에 에린 리서스 양도 함께하게 될 것 같아.”
* * *
카론에게 에린은 꽃 같은 존재였다.
자신이 지켜 줘야 하는 사람. 바람이 불면 막아 주고, 힘들어하면 감싸 줘야 하는 사람.
카론은 어머니가 죽기 전 그에게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에린을 지켜 주렴.”
그래서 그에게 하나뿐인 누이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카론은 종종 생각했다. 혹시라도 내가 누님을 싫어하는 날이 올까?
그럴 때마다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녀를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린이 자신을 보고 웃는 게 좋았다.
잠들기 전, 그녀가 서툰 실력으로 책을 읽어 주는 것도, 그를 보며 카론- 하고 불러 주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어느 순간부터 에린이 변했다. 사용인들에게 친절했던 에린 리서스는 없어졌다.
틈만 나면 후작성의 사용인들을 괴롭히고, 매질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하루에도 몇 명씩 제 발로 일터를 떠나곤 했다.
처음에는 카론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도우려고 했다. 누가 뭐래도 그에게 에린은 하나뿐인 누님이었으니까.
하지만 후작 부인이 그런 카론을 조곤조곤 타일렀다. 그녀는 카론의 뺨을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웃었다.
“카론, 네가 에린을 아낀다면 혼자 이겨 낼 수 있도록 거리를 두어야 한단다.”
“하지만 누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걸요…… 저마저 그렇게 행동하면…….”
“걱정하지 말렴. 에린은 내가 아껴 줄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잘못된 건 내가 다 고쳐 줄 거야.”
그게 맞는 건지 카론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후작 부인이 자신에게 상냥한 새어머니인 만큼 에린에게도 좋은 부모이리라 믿었다.
‘하지만 어째서…….’
왜 갈수록 그녀가 엇나가는지 카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에린의 기숙사 방문 앞에 도착한 그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카론?”
그러자 에린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건지 그녀의 머리가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두 눈엔 옅은 당황의 기색이 비치고 있었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건가. 카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분이 더 나빠졌다. 카론은 자신도 모르게 에린의 손을 살폈다.
그녀의 손바닥 상처는 아침보다 더 심해져 있었다.
‘대체 뭘 했길래 더 심해진 거지?’
상처가 났으면 그 부위를 안 쓰려고 노력하는 게 정상 아닌가?
오늘 아침부터 에린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 마치 그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들어가도 돼? 할 말이 있어.”
카론의 말에 에린의 눈매가 설핏 굳었다. 마치 그와 대화하는 걸 꺼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은 그 머뭇거림도 낯설었다. 왜냐하면 에린은 줄곧 그와 대화를 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론은 새어머니의 말씀대로 에린과 거리를 두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무심한 동생과 겨우 마주한 에린의 기분에 대해서는 지금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카론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에린의 방 안은 그의 생각보다 더 단출했다. 그것 또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사치는 유명했다. 일반적인 기사가 받는 석 달 치 봉급을 하루 만에 탕진하는 건 예삿일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사 모은 많은 보석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초라한 방에서 지내고 있단 말인가.
‘마차는 화려하게 꾸몄으면서.’
그가 에린에 대해 모르는 사실이 너무 많았다.
거의 일 년 만에 한 대화가 고작 아침에 그녀에게 화를 낸 것이었으니…….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한 에린은 예전보다 더 연약해진 거 같았다.
‘먹는 건 제대로 챙겨 먹는 건가?’
팔은 깡말라 잡기도 불안해 보이게 생겼고, 얼굴 역시 창백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오늘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던 헛소문들이 떠올랐다.
“에린 리서스가 리서스가의 검술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대.”
카론도 아직 하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완벽하게’의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리서스가의 검술을 어떤 식으로 펼쳐 내야 완벽한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 감히 리서스 사람이 아닌 이들이 리서스가의 검술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완벽’했다는 게 중요했다.
에린이 검을 들고, 검술을 사용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에린은…… 에린은 검술을 몰랐다.
그녀는 어린 시절 성안에서 그가 검술을 연마할 때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다.
“검술 평가를 했다고 들었어.”
“…….”
“리서스가의 검술을 사용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야? 너는…….”
“오랜만이야, 카론.”
카론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의 누님이 이런 얼굴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진짜 그리운 추억을 마주한 듯했다.
오랜만이라니. 그들은 당장 오늘 아침에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나.
물론 그녀가 하는 말이 그런 것을 뜻하는 건 아니리라.
에린의 초록 눈동자가 마치 넓은 초원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눈동자가 아버지보다도 더 긴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해 카론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
“그래. 제대로 대화를 나눈 지 한참은 된 거 같아서.”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앞에 따뜻한 우유를 내려놓았다.
카론은 그 우유를 보며 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을 다섯 살 아이 대하듯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에린이 악녀라고 불리기 전, 그저 따뜻하고 상냥하던 예전의 누님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을 묵과할 수도 없었다.
“페르딘 경에게 네가 마물 토벌에 참여한다고 들었어.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마물 토벌에 가려면 초급반에서 상위 다섯 명 안에는 들어야 해. 그만큼 위험한 곳이라고. 애초에 네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란 말이야.”
그의 말대로였다. 마물 토벌에 참여할 수 있는 건 각 반의 상위 다섯 명뿐이다.
그건 선별된 인재들인 검술 학부생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카론은 알고 있었다.
그도 지금 속해 있는 중급반의 상위 다섯 명 안에 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물론 에린은 지금 그와 페르딘의 예비 기사단 사람들과 다르게 초급반에 속해 있지만, 그 반에서 다섯 명 안에 드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나도 알아.”
그렇게 말한 에린은 자신의 몫으로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카론은 다시금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이곳에 자신이 온 목적을 상기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 마물 토벌엔 아실리 공녀도 함께한다고.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몰라서 그래?”
“…….”
“아니, 공녀가 아니라 릴리아라는 인간이 가는 게 제일 문제야. 누님을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이 널려 있다고!”
점차 고조되는 목소리에 에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론은 드디어 그녀가 현실을 깨달았다고 생각해 안도했다.
하지만 이어진 에린의 말은 그의 상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