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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6화 (6/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6화

원래의 에린 리서스는 검술 평가를 끝내지 못하고 울면서 달려 나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검술을 펼쳤다.

에린은 평가장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길을 막고 있던 다른 이들이 서서히 길을 터 주었다.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그녀의 귀로 다른 이들이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마나 때문에 민감해진 몸이 아직 긴장을 풀지 못해 작은 목소리도 쉽게 감지해 냈다.

필립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에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그녀가 어떻게 리서스가의 검술을 펼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손바닥이 욱신거리고, 무리하게 움직인 몸에선 근육통이 느껴졌다.

몸이 당장이라도 쉬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쉴 수 없었다.

이 검술 평가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페르딘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에린은 목이 멨다. 저렇게 가만있어도 빛나는 사람이 나를 만나서…….

생각이 길어지면 그 끝은 항상 똑같았다.

나를 만나서…… 페르딘이 죽었다.

세 번의 삶을 살면서도 잊지 못한 기억.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에린은 아까부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페르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페르딘 경.”

그의 찬란한 금발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자신을 마주 보는 상대의 깊고 푸른 눈에 에린은 숨이 막혔다.

가까이서 보니 그가 살아 있다는 게 더욱 실감이 났다.

페르딘이 죽은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녀는 방 안에서 제발 무사히 돌아오길 빌며 울다가 그의 부고를 들었다.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고 했다. 마물의 밥이 되어, 그렇게 초라하게 갔다고.

제국의 2황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최후였다. 그 모든 게 그녀의 잘못이었다.

에린은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황자가 왜 죽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니? 전부 너랑 약혼해서란다.”

그가 죽고 후작 부인이 자신의 귀에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에린은 그와의 약혼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의 주제를 알았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2황자와 모두가 증오하는 악녀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냉혹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1황자 디트리온을 좋아했지만 그보단 다정하고 포용력이 넓은 페르딘이 황제가 되기를 원했다.

“너 때문에 죽은 거야…… 그 사람도, 그 사람의 기사들도. 아실리 공녀와 공작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으니…… 너와 약혼하지만 않았더라면 2황자도 죽지 않았을 텐데.”

그런 그가 황제가 되지 못한 건 전부 그녀 때문이었다.

에린은 그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지금도 페르딘을 죽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단둘이…… 할 말이 있어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에린의 말에 페르딘의 옆에 있던 데렉의 두 눈이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그녀는 그의 경계심을 이해했다. 아마 후작 부인이 사교계에 퍼트린 소문을 들은 거겠지.

후작 부인은 에린의 평판을 떨어트리려고 일부러 거짓말에 눈물을 더하곤 했다.

“에린 리서스가 페르딘 전하에게 한눈에 반해 후작 부인을 괴롭힌다고 하던데?”

“이번 약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죽겠다고 했다나? 정말 악독하기 짝이 없군.”

자신에 대한 소문을 떠올린 에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나를 혐오해도 할 말이 없어.’

그녀는 페르딘이 지금 이 제안을 거절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피하기는커녕 그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시간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그전에…….”

페르딘은 말을 더 잇는 대신 주머니 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피로 엉망이 된 손을 감싸 주었다.

에린은 단정하게 묶인 손수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지금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악녀에게도 이렇게 친절할 수 있다니.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에린은 다시 한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 * *

아텐츠 아카데미의 기숙사.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방인 페르딘의 집무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데렉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텐츠 아카데미가 설립된 목적은 많은 재능 있는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신분을 따지면서 교육을 시키기엔 마물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었다.

그래서 초대 렉시아 황제는 아카데미 내에서는 신분을 따지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렉시아 제국의 황자들은 아카데미 때부터 자신의 예비 기사단을 꾸릴 수 있도록 했다.

황제가 되려면 그만큼 뛰어난 인재들을 포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원칙 때문이었다.

기량을 인정받아 예비 기사단에 속한 평민 학생들은 아카데미를 졸업 후 따로 귀족 신분이 주어지기도 했다.

지금 데렉의 눈앞에 있는 이들은 그런 ‘뛰어난’ 학생들이었다.

페르딘이 졸업을 하면 바로 그의 기사단의 단원이 될 충성스러운 심복들이기도 했다.

물론 뛰어나다고 해서 인성이 좋다는 건 아니었다.

제각기 개성이 너무 강한 이들을 통제하기엔 데렉은 너무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가시방석을 떠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흑발에 푸른 눈을 지닌 미남, 아몬 헤도르가 데렉을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린 리서스가 변했다고?”

아몬의 말에 대답한 건 그의 앞에 앉아 있던 릴리아였다.

그녀는 자신의 길고 탐스러운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마물 토벌에 카론 말고 에린 리서스를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소문처럼 뛰어나다면 특별히 마물을 혼자 토벌할 기회를 줘도 되겠어.”

마물 토벌에 에린을 데려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옆에 있던 카론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제정신인가? 에린에게 혼자 마물을 토벌할 기회를 준다고?

말이 기회지 그건 죽으라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누님은 아직 검술 학부로 전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마물 토벌에 따라가긴 한참 일러요. 게다가 상위 성적을 낸 자들만 토벌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카론 역시 에린이 리서스가의 검술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특히 에드워드가 그에게 다가와 꺼낸 말을 듣고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에린 경이 검술을 배웠다고 왜 말하지 않았지? 그 정도 경지라면 분명 어렸을 때부터 검을 배웠을 텐데.”

그럴 리 없었다. 그의 누님, 에린 리서스는 검술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안 그래도 아침부터 에린의 다친 손이 떠올라 정신이 없었는데, 계속해서 들리는 이상한 소문들에 카론의 기분은 갈수록 저하됐다.

“누님은 검을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어요. 마물 토벌에 절대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흐응…… 그거 정말 이상하네? 검술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리서스가의 검술을 완벽하게 펼쳤다고? 아무리 네 누나라도 너무 감싸고 도는 것 아니야?”

릴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카론에게 눈을 흘겼다.

“부러울 정도의 우애야. 나에게도 그런 오빠가 있었는데 말이지. 누구 때문에 이제 영영 볼 수 없게 됐지만.”

“그만하시죠, 릴리아.”

카론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악물었다.

대체 왜 이런 소문이 도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이 자리가 끝나면 에린에게 가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그 헛소문 때문에 에린이 마물 토벌에 참여하게 된다면 마물 때문이 아니라 지금 그의 옆에 있는 릴리아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마물의 습격을 받은 척, 에린을 죽이려고 들 수도 있었다.

카론은 릴리아의 옆에 앉아 있단 사실만으로도 속이 거북해졌다.

릴리아는 카론의 예민한 반응이 재밌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카론이 아카데미에 와서 가장 먼저 실감하게 된 사실은 에린에게 적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후작성에서 지낼 때도 그녀가 한 짓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러 에린의 소문과 험담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저 언젠가 나아질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에린이 8년 전 죄 없는 릴리아의 오라비를 죽인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카론이 그 사건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된 건 아카데미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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