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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5화 (5/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5화

연무장에 들어온 순간 느껴지는 매서운 기세에 에드워드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에린을 본 순간,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검술 학부생들의 기세를 느끼지 못한 것인지 평온해 보였다.

그게 가능한 일인 걸까? 마치 초식 동물이 육식 동물을 무서워하듯 일반인이 예비 기사들의 기세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별일이 다 있군.’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 위화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에린이 특별히 둔감한 체질일 수도 있었으니까.

애써 그렇게 생각한 그는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좋은 아침.”

에드워드는 짧게 인사했다.

학생 중에는 그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도 있지만, 아카데미 안에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다들 잘 쉬어서 그런지 얼굴이 훤해졌군.”

그는 그렇게 말하곤 학생들을 훑어봤다.

아텐츠 아카데미 검술 학부의 학생들은 다들 엄청난 천재였다.

특히 제국인이 아닌 왕국인이라면 그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혀야만 입부 자격이 주어졌다.

즉 기사가 되고 싶은 이라면 다들 오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에드워드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에린을 응시했다.

풍성한 갈색 머리에 햇빛도 제대로 쐰 것 같지 않은 흰 피부가 보였다.

‘검도 제대로 못 들게 생겼군.’

평가는 빨랐다.

“첫날은 가볍게 검술 평가부터 시작한다.”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하곤 한 학생을 가리켰다.

검술 평가의 시작이었다.

* * *

에드윈 왕국의 필립, 리아몬드 왕국의 비앙카, 러셀 왕국의 호메르…….

에린은 다른 학생들의 차례가 끝나길 차분히 기다렸다.

에드워드가 호명하는 순서가 어떤 순서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검술 수업의 첫날은 특별히 상급반과 초급반이 같이 수업을 듣는다.

‘강한 순서대로 하고 있어.’

상급반인 페르딘과 데렉은 이미 한참 전에 검술 평가를 마무리하고 연무장에서 내려갔다.

페르딘의 검은 진중했고, 데렉의 검은 날카로웠다.

생각보다 강맹한 그들의 기세에 에린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에린은 검술 평가를 하는 이들의 검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바라봤다.

그런 그녀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에린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방금 전 검술 평가를 끝낸 에드윈 왕국의 필립이었다.

‘나를 싫어했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아텐츠 아카데미의 검술 학부 학생이란 사실에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검술 학부 내에서도 에린을 제일 경멸했다.

“그렇게 보면 뭐라도 달라질 거 같아?”

그녀는 대답 대신 그를 올려다봤다.

필립의 키는 매우 커서, 키가 작은 편인 에린이 고개를 젖혀야 겨우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필립은 험악한 인상을 구기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네게 벌어질 일을 알려 줄까? 얼마나 망신을 당할지 말이야.”

“예언 능력이라도 있나 보지?”

“뭐라고?”

에린의 대답에 필립은 진심으로 놀랐다. 그는 그녀를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

필립은 자신의 덩치가 얼마나 큰 압박감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웬만큼 기골이 장대한 기사들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만큼 근육으로 꽉 찬 몸이었다.

그런 자신이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압박감이 엄청날 거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그런데 태연하게 대답을 하다니? 심지어 별로 긴장하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그녀와 두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상대는 검을 배우지도 않은 조그마한 일반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의아함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필립은 에린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한 번 입을 떼는 데도 식은땀이 계속 흘러나왔다.

“기사도 아닌 게…….”

에린은 이 오랜만에 듣는 말에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 필립에게 항상 들었던 말이었으니까.

그때의 에린은 필립의 말에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예비 기사도 아니었으니까.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사람을 누가 검술 학부의 학생으로 인정해 주겠는가.

하지만 만약 과거의 그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망설임 없이 기사가 됐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더 이상 모욕을 받을 이유는 없다.

에린이 자신의 손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필립은 그녀의 기행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에린이 손에 감은 붕대를 보고 기가 찬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저것도 분명 꾀병이 틀림없으리라.

필립은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에린 리서스가 마물 떼에 습격당했다네? 레켄 경이 없었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대! 천벌을 받은 거지 뭐.”

그 말대로 마물 떼를 마주쳤다는 사람치고 손에 감은 붕대 외에는 다친 곳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역시 동정심을 자극하려고 감아 놓은 거였군.’

하지만 에린의 손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자 필립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손은 상처투성이였다. 필립은 그게 무얼 뜻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매우 어렸을 적부터 수십 번은 마주했던 상처니까.

여린 손바닥이 까지고, 피를 흘리고 나중에 굳은살이 생기기까지의 과정.

그건 처음 검을 들기 시작했을 때 생기는 상처였다.

에린의 손은 그녀가 검을 다루고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필립은 또 다른 소문을 떠올렸다.

“에린 리서스가 마물 떼를 물리쳤다는 말도 있던데. 참 재미있는 헛소문이야.”

에린이 풀어낸 붕대는 천천히 떨어져 그의 발치에 닿았다. 필립은 단순한 천 쪼가리가 올라앉은 제 발등이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거기서 지켜보고 있어.”

“…….”

“내가 진짜 기사인지 아닌지, 직접 보고 판단해.”

에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드워드가 그녀를 호명했다.

“에린 리서스.”

순식간에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불신, 경멸, 아무런 기대도 없는 시선들.

그녀는 그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검을 들어 올리는 에린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철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였다.

풉. 누군가가 비웃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에드워드가 시퍼런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어서 비난은 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에린의 비극을 누구보다 즐겁게 감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거에 에린은 그 비웃음 소리를 듣고 이 자리에서 눈물을 쏟아 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럴 줄 알았어. 제 주제를 알고 알아서 사라졌으면 좋겠네.”

그때 들었던 말들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에린 역시 자신을 동정하지 않았다.

세 번의 삶을 살고 나서야 깨달았다. 혼자 슬퍼해 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하고 억울하면 강해져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죽도록 노력했다.

이제 에린은 혼자서 눈물을 닦는 법을 알게 됐다.

곧 팔의 떨림이 멎었다. 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미약한 몸 안의 마나가 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녀의 팔에 힘을 보탰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양의 마나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에린이 팔을 곧게 뻗었다. 처음 검을 들 때와는 다르게 흔들림 없는 동작이었다.

리서스의 검술은 기본적으로 검에서 강한 힘이 느껴져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리서스 검술을 여성이 펼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개소리.’

에린은 한 단어로 그들의 말을 일축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리서스 검술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니까.

리서스 후작이 마스터가 되지 못했으니 모두 카론이 마스터가 될 거라고 기대했고 과거에는 에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당대 리서스 가문은 마스터가 나오지 않는다.

카론 리서스는 마스터가 되지 못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누구보다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검의 선택을 받은 건 나야!’

마나로 강화된 에린의 몸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진동했다.

에린의 손에서 완벽한 리서스 검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흔들림 없이 말끔한 검의 궤적이 허공에 아로새겨질 때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도무지 소문의 에린 리서스가 선보이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완벽한 검술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팔을 후들거리며 철검을 들어 올리던 모습에서 누가 저런 노련함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에린이 짧은 시연을 끝마치자, 곧 장내에 쥐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 고요함 속에서 교관이 입을 열었다.

“훌륭한…… 검술이군.”

에드워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린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에드워드는 놀란 기색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더 말을 꺼내고 싶어도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에린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터진 손아귀에는 피가 흥건했다.

여러 가지 소음으로 시끄러웠던 연무장엔 여전히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이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에린의 손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작은 쾌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과거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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