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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4화 (4/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4화

페르딘의 시선에 데렉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 아실리 공작은 제국 최강의 소드 마스터야. 카론의 재능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 당장 힘이 돼 줄 수 있는 기사야.”

데렉의 말에 페르딘은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보이는 에린의 모습에 그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는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페르딘의 반응에 데렉 역시 시선을 돌리다 에린을 발견했다.

데렉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정말로 왔잖아?”

그는 검술 학부로 전과를 하겠다는 에린의 말이 그저 철없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정상인은 비정상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니까.

장난이라기엔 도를 지나친 느낌이었지만, 그녀가 워낙 미치광이로 소문나 있다 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진짜 검술 학부에 발을 들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에린을 보는 데렉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로 정신 나간 여자였군.’

에린이 페르딘과 약혼한 이상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그의 명예가 훼손될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차오르는 분노에 그는 이를 갈며 에린을 노려봤다.

한 가지 희한한 점은 모두가 적대적인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게 분명 느껴질 텐데 그녀가 전혀 겁을 먹지 않은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후작가에서 애지중지 자라 온 레이디라기엔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반응이었다.

보통의 레이디였다면 한꺼번에 쏟아지는 살기에 울음을 터트렸을 게 분명했다.

‘뭐, 생각보단 강심장인가 보지.’

그게 아니라면 이 연무장에 걸음 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리서스 후작가의 악녀라는 위명을 얻는 것도 보통 신경이 굵지 않고서야 힘들었을 테니까.

데렉은 그렇게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얼마 안 있어 벌어질 상황이 뻔히 보였다.

‘분명 못 하겠다고 울고불고하겠지.’

그러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 * *

데렉의 예상과는 다르게 에린은 앞으로 닥칠 일에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다.

아니, 어찌 보면 비슷한 상태이긴 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검을 보며 오히려 기분 좋은 전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검을 마주할 때마다 느껴지는 그 두근거림을 좋아했다.

전생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들었다. 마치 숨 쉬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만약 과거에 검을 배웠더라면 전생과 비슷한 삶을 살았겠지.’

리서스 가문은 대대로 강한 기사를 배출했다. 그 역사만큼이나 리서스식 검술은 제국에서 유명했다.

현 리서스 후작 역시 비록 마스터는 되지 못했지만 뛰어난 상급 기사였다. 게다가 리서스 가문에는 특이한 내력이 하나 있었다.

한 세대 내에 소드 마스터가 나오지 않으면, 항상 그다음 대에 마스터의 자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

한마디로 카론과 에린 중 한 명은 마스터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도련님과 아가씨 중 어떤 분이 후작가의 검술을 잇게 되는 거야?”

“글쎄. 어느 분이 더 재능 있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대.”

그래서 리서스 후작은 두 아이 모두에게 검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어느 가문에서나 많은 기사를 원했고, 높은 수준의 기사를 가진 게 곧 가문의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리서스 후작가 사람들은 상급 기사가 될 확률이 높았다.

상급 기사는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으며 최소 백 마리의 하급 마물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니 후작이 에린에게 검을 가르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후작가의 역사에는 여기사도 많았기에 에린 역시 기사가 되고 싶었다.

코렐리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런 꿈을 꿨다.

그녀는 에린이 검을 배우는 걸 못마땅해했으며 급기야 후작에게 거짓말을 전하기도 했다.

“에린은 검을 싫어하는 거 같아요. 그냥 레이디로 지내고 싶은가 봐요.”

후작은 국경을 지키느라 바쁜 저를 대신해 아이들을 챙겨 주는 부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후작 부인이 전해 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곤 했다.

그래서 에린은 자라면서 한 번도 검을 만지지 못하고 그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로 오는 길에 레켄 경에게 한 말 역시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리서스의 검을 배운 적은 없지만 항상 카론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방에서 나뭇가지로 그의 검술을 따라 한 적도 있었다.

수를 놓거나 음악 수업을 하는 날에도 그녀의 시선은 카론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가 하는 검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님은 왜 검술 연습을 안 해?”

어느 날 카론이 자신에게 다가와 물었을 때, 에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론의 악의 없는 물음이 그녀를 더 비참하게 했다.

나도 하고 싶었다. 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은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에린도 바느질이나 악기를 배우는 것보다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카론이 어려워하는 동작도 그녀는 쉽게 성공하곤 했다.

하지만 에린이 후작 부인에게 검을 배우고 싶다고 할 때마다 돌아오는 말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레이디가 검 따위 배워서 뭐 하려고?”

그 후에 이어지는 벌은 카론의 검술 연습이 끝나고 후작이 전선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서 후작 부인의 술수로 검술 학부로 전과를 하게 되었을 땐 정말 기뻤다.

그게 기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그 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면서도 그랬다.

‘내 자리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니었다. 나도 당신들처럼 되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의 행동은 그저 기사들을 업신여기는 거로 보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기사를 존중하는 검술 학부 내에서 에린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걸 증명하듯 언제나 실력이 형편없었다.

에린은 그때를 떠올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무겁다.’

검을 든 그녀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그저 싸구려 철검일 뿐이었다. 전생에 그녀가 사용하던 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조잡한 검.

하지만 단련되지 않은 에린의 육체는 그 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전생에 지고의 경지를 이뤘다 한들 지금의 에린은 기본적인 체력조차 없는 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할 수 있어.’

긴장감을 추스른 에린은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페르딘과 눈을 마주했다.

과거에도 그는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녀는 페르딘의 눈앞에서 울면서 도망쳤다.

‘당신도 나를 경멸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러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과거 페르딘이 그녀에게 내어 준 것이 동정심 일지라도…… 아니, 다른 이들에게도 베푸는 공평한 자애로움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앞에 있을 때면 추악한 악녀가 아닌 평범한 에린 리서스가 될 수 있었다.

그게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페르딘은 알고 있었을까?

에린은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붕대가 감겨 있는 작고 마른 손과 그 손에 들린 싸구려 철검이 보였다.

그 검을 보면서 그녀는 다짐했다.

그런 그를 위해서라도.

이번 생에는 모든 게 바뀔 것이다.

* * *

아텐츠 아카데미의 검술 교관, 에드워드 플론. 그는 지금 매우 골치가 아픈 상태였다.

‘에린 리서스가 진짜 왔을까?’

진짜 와도 문제였고 안 와도 문제였다.

리서스 후작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딸을 검술 학부로 전과시킨 걸까?

그가 자신의 딸에게 죽고 못 산다는 건 매우 유명한 이야기였다.

에드워드는 이내 에린 리서스가 검술 학부에 오기 위해 금식을 했다는 소문을 기억해 냈다.

아마 딸이 굶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리서스 후작이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여 벌인 일이겠지.

심지어 후작가에선 에린 리서스가 마물 떼를 물리쳤다는 헛소문까지 퍼트리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검술 학부에 들어가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에 에드워드는 기가 찼다.

워낙 기행으로 유명한 후작가의 영애이니 다른 건 다 그러려니 했지만, 마물 떼를 물리쳤다는 거짓말은 좀 심하지 않나.

‘그리고 그 사실을 대체 누가 믿겠어.’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에드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는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는 리서스 후작을 존경했다.

그가 곤란한 일을 겪는 걸 에드워드는 원치 않았다.

‘그냥 얌전히 며칠 지내다가 포기했으면 좋겠군.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검술 평가 때 망신을 당할 테니…….’

그렇게 생각한 에드워드가 연무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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